나르시시스트와의 결혼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생각해보고 할게. 내가 잘할 수 있도록 응원만 해줘.”
이 말이 오히려 나르시시스트를 자극하는 말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나의 독립적이고 쾌활한 성격에 정복 욕구를 느꼈던 것이다. 결혼 생각이 없던 나는 그에게 언뜻 나의 생각을 전달했다. 그는 여자들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결혼을 못 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 아니냐며 불 같이 화냈다. 결혼은 무조건 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시간 낭비 하기 싫다고 그는 말했다. 그 후 데이트마다 나의 표정과 말투를 꼬투리 삼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거냐며 불만스러워했고 그것이 지속되자 나는 마치 결혼이 그에게 내 사랑을 증명하는 최후의 수단처럼 느껴졌다. 그때 내 나이는 고작 20대 중반이었다.
나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는 지금은 나 자신에 대해선 생각할 겨를이 없어 어떤 성향인지 모르겠으나 예전엔 그랬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 모두 어설프고 불편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줄 수 없고 받은 만큼 무언가를 줘야 될 것만 같은 부담에 차라리 주는 게 마음 편했다. 내 마음 편하자고 연인에게도 선을 그었던 것이다. 내가 그은 선은 자주 그를 짜증 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줌으로써 그 대가로 조종하고 싶었던 것이니까. 주는 것도 받는 거도 뜨뜻미지근한 나에게 그는 더욱 몰아붙였다. 만약 내가 질척이며 그의 부를 이용하고 결혼을 바랐다면 결과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더 이상 흥미를 갖지 못했을 테니까.
불안정 애착 유형을 가진 의존적인 사람이 나르시시스트에게 가스 라이팅을 당하기 쉽고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대부분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잠깐 이용당할 뿐 나르시시스트들은 결국 그들에겐 흥미를 잃어버린다. 상대방을 점점 메말라가게 만들며 자신의 열등감을 투영시켜 폭발하게 만드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취미니까. 이용하기 쉬운 상대 보단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에게 흥미를 느낀다. 그러고 그 상대를 조종하여 피폐하게 만들었을 때 비로소 열등감을 해소한다. 앞으로 남편과의 일화를 바탕으로 남편이 사용한 나르시시스트의 흔한 방어기제도 소개할 예정이다. 결혼이 성사되기까지는 속내를 감추었던 그는 끊임없이 말했다.
“내가 지켜줄게. 우리 결혼하자.”
나보다 똑똑하고 냉정한 그의 말에 점점 나는 스스로를 의심했다. 나는 작은 일에도 예민하고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혼자서는 불완전한 사람이었다. 또 그가 나의 사랑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기에 결혼으로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큰 확답 없이 자연스레 결혼을 진행했다. 미성숙한 남녀가 만나 앞으로의 일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판단해보지 않은 채 소꿉놀이하듯 결혼식은 이루어졌고 친인척과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축복받으며 서로에게 헌신하고 사랑할 것임을 맹세했다. 그날 서로 다른 생각이 마음속에서 각자 피어났다.
나: 이제 그는 나의 남편이자 가족이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함께하며 그가 손, 발이 필요하면 기꺼이 손, 발이 되어주어야겠다.
나의 바람과 다르게 안타깝게도 그는 결혼식 이후 나를 자신의 소유물로 정의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