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하면 남, 녀를 구분하는 사고나 발언을 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대응 방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은 느낀다. 맞고, 틀리기 보다는 좋고, 싫고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출발할까 한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학연, 지연의 영향력이 큰 편인데, 내가 졸업한 대학 건축과의 특징은 개인주의였다. 그때만 하더라고 공대에 속해 있던 건축과는 보통 으쌰 으쌰 하며 단합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였지만, 유독 우리 학교만은 개개인의 독립성을 인정해주는 학풍이 있었다. 예술대로 유명한 학교 전체 분위기의 영향인 듯도 하다.
여기에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는데, 장점은 개인의 개성을 인정해주고 선후배 간에도 격의 없이 어울리는 점이고, 단점은 다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 뭉치거나 서로 끌고 밀고하며 돕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는 졸업 후 사회생활에도 이어져 개인 사무실로 독립한 후, 도무지 어디 물어보거나 도움을 청할 선배가 없어 매일매일이 맨땅에 헤딩이었다. 공교롭게도 나와 가깝게 지내는 이들은 모두 설계를 하지 않아 더했다.
그러다 건축사 면허를 따게 되면서 기존에 있던 학교 건축사 모임과 여성 건축사 모임에서 연락이 왔다. 단체 모임을 그다지 즐기지 않지만, 그래도 선배들이 신경 써 부르신 자리라 둘 모두 나갔다. 남자 선배들이 주인 전체 모임은 늘 익숙하게 겪어왔던 정치, 홍보, 영업의 자리였고, 의외의 기쁨을 주었던 것은 여자 건축사 선배들과의 모임이었다.
'와하'라는 여성 건축사 모임은 친목 모임에 가까웠다. 명함을 주고받는 대신 요즘 어떻게 사는지 하는 일상의 이야기가 오갔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조금 더 깊이 귀를 기울였다. 첫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는 내 마음이 좋았던 것은 결혼과 출산으로 업계에서 사라진 줄만 알았던 여자 선배들이 설계뿐만이 아닌 건설, CM, 공공기관, 인테리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맨땅에서 홀로 동동거리다,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오늘, 모임의 장인 선배님의 카톡이 날아왔다. 대형 건설사의 부장까지 하다 CM분야로 옮긴 선배였다. 이 달 말에 소모임이 있으니 시간 나면 오라는 느슨한 공지를 주시며, 먼저 독립한 후배의 블로그를 알려주신다. 설계 사무실을 하며 겪은 일종의 '분투기'인데, 혹시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며. 그리고 거침없는 응원의 멘트를 날렸다.
그대의 미래를 힘차게 응원함!!
주로 도움이 필요할 때만 찾는 사람들을 겪다, 이렇게 사심 없는 응원을 받아버리니 마음이 그만 몽글몽글해져 버린다.
그래서 마음을 탁탁탁 바로잡는다. 이토록 혼곤한 세상에, 그래도 부끄럽지 않은 후배가 되자고.
2019.02.09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