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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미로부터 Sep 11. 2021

#1. 아쉬운 사람

더 절박한 사람


#1. 아쉬운 사람


한 회사에서 꽤 오랜 시간 인턴을 했다. 정규직 전환 자리는 아니었고 기간도 3개월로 계약하고 들어갔지만, 이미 2번의 인턴을 겪은 나는 당장 취업에 대한 마음이 급했다. 이번 회사에서는 꼭 사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인턴 계약 연장에 대해서도 okay였고, 새벽 2시에 퇴근하는 것도, 저녁에 술 먹고 다시 돌아와서 일하는 것도 열심히 응했다. 회사와 팀에 잘 보여야 하는 시기였으니까. 취업 성공의 주도권을 가진 회사가 곧 갑이었고 나는 힘없는 을의 자리를 자처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5개월 정도를 일하고 나니 몸에 이상이 왔다. 안면 마비가 생겨서 한 달 정도 한의원을 다녀야 했고 몸이 아프고 나서야 이 비정상적인 업무 환경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상가상으로 “이 프로젝트를 수주하면 너도 정직원이 될 수 있어.”라고 하셔서 열심히 일했더니, 다시 돌아온 대답은 “하반기 진행 여부까지 지켜보고 정직원 여부를 결정하겠다.”였다. 그때가 이미 인턴 7개월 차였기에,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퇴사 여부를 전했다. 


그래도 좋게 봐주신 이사님이 다른 회사의 자리를 알아봐 주셨고, 면접 후 나는 다시 “인턴”으로 시작하는 자리를 덥석 받아들였다. 송별회 자리에서 다른 상무님 와 새로운 회사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다시 인턴 3개월을 한다는 나의 말에 상무님이 놀라시며 이렇게 얘기했다. 


“왜 그런 조건을 받아들인 거야? 너는 그 이상의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어. 그럼에도 네가 그 조건을 받아들인 이유는 아쉬워서야. 그런 기회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거지. 그런데 너는 충분히 사원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어.”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미 술에 취한 상태였지만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가서 바로 내 인생 첫 협상을 했다. “이런 조건이면 지금 회사를 다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인턴은 충분히 했습니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의견을 전달했는데 다행히 새로운 회사의 부장님은 내 의사를 받아주셨고, 한 달로 줄여진 인턴 과정 후에 처음으로 정직원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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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떤 연애도 그랬다. 몇 달간 짝사랑하던 오빠가 멀리 미국으로 반년간 출장을 간다던 말에,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마음을 고백했는데 그걸 받아주었고 내 인생 처음으로 내가 먼저 좋아한 사람과 사귀게 되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나의 핸드폰 배경화면, 심지어 회사 다이어리에도 살짝 사진을 붙여 놓고 일하다가 지칠 때면 사진을 보고 힘냈다. 그가 엄청난 회피형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진 말이다.



처음 서운함이 생긴 날 - 반나절 정도 잠수 타던 그 사람은 이런 부딪힘이 계속될 때마다 잠수의 시간이 길어졌다. 반나절은 곧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나중에 헤어지기 전에는 이 주가 되었다. 모두 나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갑자기 다른 얘기지만 이런 잠수는 연인에 대해 가장 예의 없는 행동이 아닐까 싶다.)


감정이 상한 그가 모든 연락에서 사라졌을 때, 내가 첫 번째로 느낀 감정은 헤어짐에 대한 불안함이었다. 어떻게 만나게 된 사람인데,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 사람인데 - 만약에라도 이별을 겪는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 불안하고, 또 불안해했다. 연락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다양한 불행 시나리오를 머리에 그리며 성가대 연습을 가서도, 회사 점심시간에도, 집에 가는 길에도 펑펑 울었다. 


그래서 다시 그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면 나는 내 서운한 감정을 숨기고 이 관계를 유지해갔다. 내게 중요한 건 내 감정보다 곁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이미 내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한 결혼 적령기의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그 대우가 어떻든, 일단 이 연인 관계에 남고 싶었다. 아무런 자존심도 없이.


그 이후 몇 개월을 버텨왔지만 결국 이 비정상적인 관계는 끝이 났다. 사실 진작에 내가 먼저 잘라내야 하는 것이었는데도 나는 할 수 없었다. ‘아쉬운 사람’이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날 대할 거면 나도 네가 필요 없어!”라는 말은 결국 이별 통보를 받고 나서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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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정규직 전환 과정이나 지난한 연애 과정을 돌아보면 아쉬움이란 곧 나 스스로가 나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취업 시장에서 내가 경력이나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계속 인턴을 해도 받아들였고, 비정상적 연애 과정에서도 내가 손을 놓으면 다시 싱글 시장으로 돌아가 이만한 남자를 만날 수 없을까 무서워서 계속 잡았던 것이다.



아쉬운 사람을 다르게 말하면 절박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 것 아니면 안 돼.’라는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절박해지고 조급해진다. 

그렇지만 내 마음과 자존심을 구겨서라도 유지해야 하는 관계는 건강한 관계가 아니지 않을까. 



생각보다 나는 괜찮은 실력을 갖추고 있을 수 있고, 아직 좋은 인연의 기회도 더 남아있을 수도 있다 라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회사도, 연애도 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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