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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우선순위와 내일까지 해주세요

by Mr text


고백하건데 내게는 병이 하나 있다. 어지간한 일들은 다 리스트 업 해두어야 하는 병이다. ‘뭐라도 하며 살아야 해.‘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온갖 것들을 플래너에 적어두는데 그 면면을 보면 달리기 30분 이상 하기, 책 읽기, 서평 써보기, 1페이지 이상 글쓰기... 같이 우선순위도 마감 기한도 정리되지 않은 날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래너를 가득 채운 이 할 일들을 보고 있자면, 뭔가 충실하게 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 할 일들 중 꽤나 여러 개에 완료를 의미하는 v표가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번엔 열심히 살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손톱 자르기나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처럼 상대적으로 쉬운 난이도의 일들에만 v표가 표시되어 있음은 애써 무시한다. 전형적으로 To-Do list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여러 개가 막 쌓이면 어떤 순서로 해야 하나요?"


신입사원 연수에서 누군가 했던 말이다. 당시 지도 선배는 아주 좋은 질문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일을 얼마나 중요한가, 얼마나 급한가의 2가지 기준으로 구분해 보면 뭘 먼저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정리가 될 겁니다."


- 중요하면서 급한 일

- 중요하지만 급하진 않은 일

- 중요하진 않지만 급한 일

- 중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


당시의 나는 스승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제자처럼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일의 우선순위를 나누는 방법을 곱씹었다. 그러나 실무에서는 저 두 가지 기준 외에 또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의 중요성과 시급성이라는 두 기준 외에 내가 알게 된 또 하나의 기준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인가.'였다. 때로 이 기준은 기존의 두 개보다도 강력했다. 누군가와 함께 하거나 확인을 받아야 하는 경우, 내가 생각하는 중요도와 시급성은 이내 흐려지기 때문이다.

전혀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지만 저 사람에게 확인받아야 하므로 언제까지는 해야 하는 일. 매우 중요하고 급하지만 상대에게는 완전히 무가치한 일... 2의 제곱에 불과하던 경우의 수가 늘어나면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지만 상사의 확인이 필요한 일이 내게 중요하고 적당히 급한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된다. 자연스레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의 우선순위는 뒤로 밀려버리는 것이다.


이 복잡 다난한 세상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몇이나 있겠냐만, 또 가만히 생각해 보면 꽤나 많기도 하다. 팀원들이 회신 완료한 메일을 받아 취합 정리하는 일이라거나, 상사에게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이를 보고서의 초안으로 풀어내는 일 등이 그렇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업무를 지시한 사람의 관심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엔 '뭐 일 같지도 않은 것을 한다고 남아서 저러나 모르겠다'는 눈빛만 받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제때 끝내지 못하면 '일 같지도 않은 것도 제대로 못하네.'라는 눈빛을 받겠지. 다른 사람들은 일 같은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지만 막상 하는 사람에겐 정말 일인 이 일들은, 하면서 티 내지도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이렇게 일 같지도 않은 일까지 끝내고 나면, 선택의 시간이 찾아온다. To-Do list에 남아있는 혼자 할 일들이 여유가 있다면 퇴근을, 그 여유마저 없다면 추가 야근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무리 고민과 선택 끝에 우선순위를 정해도 위에서 급한 일이 떨어지면 다 리셋이지만, 어쨌든 회사에서는 이렇게 체계적으로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순위에 따라 일을 해 나간다.




한 해를 보내며 다이어리에 적어두었던 To-Do list를 정리하다 보면 회사 일은 저렇게 체계적으로 고민하면서 하는 주제에 개인적인 일들은 아무 기준 없이 적어댔던 나와 만나게 된다. 개인적인 일들은 회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변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적어만 두었던 것이다.


하루에 1페이지 이상 글쓰기라거나 30분 이상 달리기 같이, 온전히 혼자 하면 되는 일들. 스스로를 위해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당장 급하진 않으므로 마감 기한 따위는 정해두지 않고 그냥 적어두기만 하다 보니 퇴근 후에 지친 몸을 누이기 바쁜 내가 실제로 해낸 일은 거의 없었다. 회사가 중요하고 급하다고 하는 것들이 내가 스스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앞에 있었던 것이다.


회사 일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세상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정작 내 목표가 틀어지는 것에는 어쩌면 이렇게도 무감각했을까. 애초에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슬그머니 끼워둔 채 단지 할 일의 목록을 적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느꼈던 걸까. 목표한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누군가의 꾸지람, 평판 하락, 실망, 비난 따위의 리스크는 없으니 그냥 혼자 마음 아파하고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는 것으로 끝내던 걸까 싶다.


내가 혼자 하면 되는 일에도 분명 중요하고 급한 일들이 있다. 가족, 친구 누가 보기에도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라 할지라도 내겐 중요하고 급한 일일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내게 "이거, 내일까지 꼭 해주세요."라고 요구할 수 있나. 우선순위를 명확히 세우고 데드라인을 맞출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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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동안은 아니었는데… 앞으론 그래야겠지?라고 다짐을 1회 적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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