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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Aug 08. 2023

보고가 잘 되었는데도 내 마음이 답답했던 이유는

생각하는 톱니바퀴

 보고가 잘 되었습니다.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보고가 잘 된 것 같습니다. 누구 하나 얼굴 붉히는 사람도 없었고, 서로의 말이 맞다며 다투지도 않았고,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잔뜩 주어진 것도 아니니까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참석만 했다가 돌아간 분들도 있으셨지만 이 정도야 어떤 회의에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보고 좋았네."같이 명시적인 말을 한 사람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이들 모두 웃으면서 돌아갔으니 보고가 잘 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고가 끝난 뒤의 제 마음은 퍽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답답했다는 표현이 좀 더 맞을까요.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배경 설명을 약간 곁들여야 할 것 같네요. 오늘 보고는 특정 주제영역을 하나 정해 그 분야의 트렌드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펴보고, 그 영역과 맞닿아 있는 우리 회사의 서비스에는 무엇이 있는지, 있다면 그 서비스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외부 전문가를 초빙하여 함께 이야기해 보는 자리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세상이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 변화의 속도를 놓치지 말자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C레벨 대상의 보고인데요, 내용으로 보면 보고가 아니라 회의나 토론, 공유회 같은 말이 더 적합할 것 같지만 C레벨을 대하는 일반 실무자의 마음은 그것이 회의든 토론이든 모두 보고나 다름없기 때문에 보고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그 '논의되는 영역과 맞닿아 있는 우리 회사의 서비스'를 담당하는 실무자였습니다. 오늘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제가 담당하는 서비스의 방향성을 정해야 하는 미션이 있는 실무 팀장.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보고가 잘 되었습니다.

 시장조사를 담당하는 조직의 임원분께서 변화하고 있는 트렌드에 대해 잘 설명해 주셨고, 제가 담당하고 있는 서비스의 현황에 대해서는 저희 임원분이 훌륭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외부 자문단은 우리 서비스가 다루고 있는 영역에 미리 진출해 있는 분들이었는데, 그분들 또한 서비스를 담당하는 실무자로서 귀담아들어야 할 소중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사장님은 이것저것 신경 쓸 일도 많으실 텐데 저희 서비스에 대해 알고 계셨고 그 옆에 계신 다른 임원분은 심지어 (본인 휘하의 조직이 아님에도!) 저희 서비스를 사용해 보기도 하셨더라고요. 그렇게 사용 경험에서 나오는 고객의 목소리가 서비스 담당자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다행히도 제가 이야기를 섞을 레벨의 회의가 아니어서 저는 그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의 말씀을 정말 열심히 듣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자리로 돌아와 받아 적은 내용들을 읽어봤을 때, 저는 혼란스러움과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모두 맞는 말, 좋은 말, 우리 서비스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한 말이었는데 정작 '그래서 앞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외부 위원들이 각자의 서비스를 성장시킨 방식, 사용자를 모은 방식은 너무 소중하고 좋은 의견이었지만 우리 회사나 우리 서비스에는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었고, 우리 회사 임원분들의 말씀도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가 아니라 '이런 쪽은 좀...', '저런 쪽도 좀...'에 가까웠습니다. 보고는 잘 되었고 무사히 끝났는데 저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오히려 더 막막해진 거지요.






 퇴근하고 집에 오는 동안에도 머리가 계속 복잡했습니다. 오늘 들었던 내용을 어떻게 정리해야 서비스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고요. 계속 답 없는 문제를 고민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질문의 내용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서비스의 방향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나는 왜 보고가 잘 된 후에도 이렇게 막막한가?'로요. 처음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잘 떠오르질 않았는데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는 척하면서 쥐어뜯다 보니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생활은 회의의 연속입니다. 당장 저만 해도 오늘 하루에만 회의가 3개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회의를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는데요, 바로 '회의의 목적'입니다.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자리인지,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회의인지, 좋은 아이디어를 찾기 위한 브레인스토밍인지, 진행 과정을 알려주기 위한 업데이트 목적의 회의인지 같은 것들이요. 신입사원 때부터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인데 왜 이게 이제야 생각났을까요. 그렇게 다들 훈훈하게 마무리한, 잘 된 보고에서 답이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오늘 보고는 답을 내거나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오늘은 "트렌드가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 트렌드는 우리가 따라가야겠네, 아니어도 되겠네, 안 따라가면 큰일 나겠네."같은 말들을 편히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그렇게 누구도 답을 내지 않는 자리였는데 거기에서 답을 찾을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찾아질 리가 없고, 그러니 자연스레 마음이 답답했던 거지요.


 그런데 사실 저는 이 보고의 목적을 모르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답을 내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을 회의 주관부서 담당 팀장님께 몇 번이나 들었거든요. 그런데도 왜 저는 그곳에서 답을 찾아가려는 생각을 했던 걸까요?


 아마도 그 자리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C 레벨의 높으신 분들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주관부서 팀장님이 '답을 내는 자리가 아니'라고 하셨어도 C레벨의 임원들이 들어왔는데 아무런 답도 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던 거지요. 그러다 보니 한 임원이 "그 영역의 서비스를 써 봤는데 이런 점이 좋더라."라고 하면 '그 방향으로 추진해 보라는 소리인가?'라고 생각하고, 다른 임원이 "이런 방향은 아닌 것 같다."라고 하면 '아, 그 방향은 쳐다도 보지 말라는 거구나.'라고 짐작했던 거지요. 그 와중에 누가 더 상급자인지 조직도를 찾아보면서요. 누군가는 제가 따라야 할 답을 정해줄 테고, 그 누군가는 이 자리의 최고 상급자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아마도 저는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찾아내려는 의지가 많이 약해진 모양입니다. 핑계를 대자면 그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저 직장인 A일 뿐인 제가 아무리 깊이 생각을 해봐야 임원의 "아닐걸?" 한 마디를 이기지 못한다는 경험을 여러 번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고민해 봐야 임원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건데 뭐. 그 임원이 아니라고 해 봐야 그 위의 임원이 맞다고 하면 맞는 거고, 더 상급자가 옆 길이 맞다고 하면 그 길이 맞는 거고. 보고하러 간 것이 아니었는데 설명하다 보니 상급자의 의견만 잔뜩 받아오는, 그래서 결국 그것을 보고서에 반영해야 하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이렇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마도요.


 혓바닥이 길었는데 요약해 보자면 나보다 강하거나 높은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그 안에서 답을 내고 어떻게든 맞추려는, 그 와중에 스스로는 잘 생각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문득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는 꼭 회사 생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는 회사 생활에서도 그럴진대 개인적인 삶에서는 어땠을까요. 스스로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기보다 주위 사람의 말에 휘둘리고 그 안에서만 답을 찾으려고 하진 않았을까요? 오늘 있었던 보고처럼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유해 주는 이야기인데도 그 안에서 억지로 답을 찾으려고 허우적댔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이렇게 보고가 잘 되었음에도 마음이 답답했던 이유는 알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서비스의 방향성을 정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건 원래부터 제가 생각해서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기 때문에 고민스럽긴 해도 답답하지는 않아 졌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해나가면 되는 거겠지요. 그리고 회사 밖의 삶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생각 한번 더 했네요. 앞으로는 이 생각들 속에서 저만의 답도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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