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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Aug 20. 2023

영웅적인 직장인, 신화적인 직장인

고동진, 《일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평소 애정하는 TV 프로그램인 '알쓸'시리즈의 장면 하나. 패널 중 한 명인 심채경 박사와 MC인 RM이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과학자들의 세리머니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과학자들이) 멋을 내주셨으면 좋겠다. 저는 갈릴레이가 따지고 이러는 게 멋있어서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신화적인 장면을 많이 만들어 주시면 제2의 미미 아웅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 장면을 보고 든 생각.

 신화적인 장면, 그것을 만들어 내는 영웅적인 과학자. 좋지. 그들을 보고 영감을 받은 후대의 누군가가 영웅적인 과학자가 되고 신화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도 좋지. 그런데 나는 직장인이다. 누구에게서 영감을 받거나 한 것은 아니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회사에 다니는 그냥 직장인. 이런 직장인도 영웅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신화적인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신화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는 영웅적인 직장인이 있?


 영웅적인 직장인이 만들어 낸 신화적 장.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스티브 잡스의, 바로 그 전설의 프레젠테이션이다. 청바지에 검은색 터틀넥 티셔츠를 입고 단상에 선 중년의 남성이, "우리는 이것을 아이폰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는 전화기를 재발명할 것입니다."라 말하는 바로 그 순간!

 충분히 영웅적이고 신화적인 순간이지만 일개 직장인일 뿐인 내게 그 장면은 어째서인지 거리감이 느껴진다. 잡스는 직장인이라기보다는 창업자이고 대표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단순히 그가 외국인이기 때문일지도?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오너나 대표가 아닌 일개 직장인이 그런 자리에 서는 모습은 조금 비현실적으로 느껴다.


 '잡스 말고 조금 덜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례는 없을까?'를 생각했을 때 떠올랐던 것이 바로 고동진 전 삼성전자 사장이었다. 오너 일가도 아니고 일반 직원으로 입사하여 열심히 일을 한 끝에 갤럭시 신화의 주역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회사인 삼성전자의 사장이 되어 잡스와 같은 자리에서 갤럭시의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그 사람. 물론 그의 이력 또한 대단해서 거리감이 있지만, 오너나 창업자가 아니라 평사원으로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같은 문화권에서 살아온 한국인이라는 점이 상대적인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는 어떻게 그런 영웅적인 직장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실마리가 담겨있는 책이 바로 《일이란 무엇인가》다.



 

 고동진 전 사장 38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치면서 그간의 조직 생활 속에서 고민하고 실천했던 경험과 나름의 노하우를 나누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성공을 위한 길이자 그 자체로 목표'라고 생각했던 '일'과 그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정리해 두었다. 이를테면 '영웅적인 직장인이 되기 위한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책을 통해

워라밸이란 '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과 삶을 모두 균형 있게 투자하는 것'

"이거 내 일이 아닌데?"가 아니라 "이참에 이 일도 한번 해보자."하고 도전하는 것이 자기 계발이다.

같이 일반적인 직장인은 보통 하지 않는 색다른 생각,


책상 앞에 앉아 상상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방향을 전환하려면 현장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최선은 과정일 뿐 최고로 증명하라. 결실 없는 성실은 무의미하다.

같이 그야말로 사장님이고 경영자가 할 법한 말,


일하는 사람에겐 체력도 능력이다.

시간관리를 잘하고 어학 능력과 업무 전문성을 키워라.

역사와 한자를 공부하며 시대에 대해 고민하고 마음을 다스리라.

같이 잔소리처럼 들리는 이야기까지, 직장을 다니며 일을 하는 후배들을 위한 다양한 생각을 나눈다. 물론 그가 살아온 시대상과 환경이 요즘의 그것과 달라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스스로 걱정했던 것처럼) 세대 차이에 의한 다름과 낡음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이 또한 꼭 회사에서 일을 대하는 직장인의 입장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자신의 목표를 대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일 부분도 생각해 볼 부분도 많은 책이었다.

 



 그야말로 구구절절 맞고 옳은 이야기였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뒤 마음이 그리 편치는 못했다. 저자의 말이 맞음은 알겠지만, 그 마음가짐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책 전부를 통틀어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이 문구였다.


 직장인은 '회사 노예', '월급 노예'같은 단어들로 폄하될 대상이 아닙니다. 성실함과 꾸준함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멋진 사람,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12p)



 우리는 위대함을 "그래도 지구는 돈다."거나 "이것을 아이폰이라고 부릅니다."라고 말하는 신화적 장면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우리의 꾸준함과 성실함은 스스로 '노예'라는 멸칭으로 표현하는 겸손함(?)을 보이기도 한다. 이 땅의 직장인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꾸준함과 성실함은 이미 그 자체로 위대한데도 말이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는 직장인이나 다름없는 월급쟁이 음악가 생활을 하면서도 생전에 1천 곡 이상의 작품을 작곡했다고 한다. 거의 매주 한 곡씩 작곡해 내는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다작을 했음에도 각 작품의 퀄리티도 훌륭해서 한 클래식 애호가는 "평생 바흐의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항상 새로운 바흐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록 "그래도 지구는 돈다."거나 "전화기를 재발명하겠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바흐도 충분히 신화적인 업적을 남긴 영웅적인 직장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음악의 아버지까지 가지 않더라도 영웅적인 직장인은 멀리 있지 않다. 매일같이 출퇴근하며 돈을 벌고 자식들을 길러낸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도 충분히 훌륭한, 영웅적인 직장인이다. 그리고 주말의 끝에 출근하기 너무 싫다고 말하면서도 '내일 출근할 때 뭐 입지?'를 고민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도 그렇다. 꼭 직장인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꾸준하고 성실히 일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신화적인 장면을 쓰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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