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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코펜하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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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menade Oct 30. 2018

날씨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고 위시리스트에 올려놨던 할일들을 대부분 마친 요 며칠

더 이상 멍청이짓을 하거나 무엇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데 이상하게 썩 유쾌하지 않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남는건 시간, 돈은 신용카드가 맘껏 대주고 있는대도 뭐가 문제인걸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푹 자고도 이상하게 무기력한 것이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모든 여행을 통틀어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고 싶다 생각할 정도였다.


대체로 기분이 말끔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놓친듯 늘 찝찝해하는 특기를 가진 나는

원인을 찾겠답시고 또 생각이라는 것에 파고들기 시작한다.

여행 중엔 가장 하기 싫었던 쓸데없는 자기성찰.


느즈막히 일어나 아침을 먹고 다시 누워 창가를 바라보았다. 블라인드도 걷지 않은 채.

어차피 밋밋한 잿빛 하늘에 축축하게 젖은 땅,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뭇잎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겠지.

바람은 또 얼마나 쌩쌩 불어대는지..굳이 창밖을 보지 않아도 그 소리 만으로도 움츠러들게 한다.


어제 하루는 이랬다.

초겨울 맞바람에 억척스레 자전거를 타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우박에 신나게 귀싸대기를 맞고,

급히 카페에 들러 한기를 떨치기도 전에 집주인이 내게 열쇠를 주지 않은 채 외출한 것을 알았고,

졸지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우중충한 길거리를 목적 없이 방황했다.

어렵사리 집에 들어가 잠자리에 누웠지만 심하게 부는 바람 소리에 잠이 깨버렸고,

바람에 부딪혀 기분 나쁘게 삐걱대는 울타리를 고정시키느라 새벽에 사투를 벌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맞이한 오늘 아침,

오늘 할 일은 2주간 빌렸다 도난당하고 다시 빌린.. 애증의 자전거를 반납하는 것 뿐.

어제밤 가까스로 결심한 스웨덴 말뫼 당일치기 계획은, 눈도 채 뜨기 전에 들어버린 거센 바람소리와 함께 진작 날아갔다.


낯선 이 도시에서 할 일이 없다는 막막함보다,

뭘 하고 싶은 기운이 없는게 나를 위축시킨다.


그러다 갑자기 블라인드 너머로 무언가 반짝!거렸다. 거센 바람이 구름을 몰아낸 틈을 타 잠깐의 햇빛이 내려온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 밖에 빨리 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이라도 맑게 걷힌 하늘을 보고싶다는 충동. 첫눈 맞으러 뛰쳐나간 적은 있지만 햇빛 보자고 서둘러 나서긴 처음이다.

그렇게 아침에 본 그 한 조각 햇빛에 나는 종일 움직이고, 거리의 많은 풍경을 보고, 이 곳에서의 삶을 생각한다. 그제야 왜 내 감정이 무겁게 바닥을 기어댔는지 알아챘다.


다 날씨 때문이다.


바람 많고 비 많고 그래서 어둡고 추운 이 그지같은 날씨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공간을 고민하게 하고, 따뜻함을 주는 뭔가를 항상 곁에 두도록 만든다.

잠깐이라도 해가 뜨면 노출증 환자처럼 훌렁 옷을 벗고 바닷물에 뛰어드는 호기를 부리게 한다.

오갈 곳 없는 밤 정다운 이들은 서로의 집에서 와인과 차를 곁들인 만찬을 나누고

오갈 곳 없는 밤 어울릴 사람 없는 이들은 칼스버그 맥주 짝에 절여 지겨운 삶을 잊게 한다.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스산함이 덴마크 사람들을 서로 죽고 못사는 집단주의자로 만들고

좀 더 추운 윗동네 스웨덴 사람들을 무뚝뚝한 개인주의자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첫 주엔 화창한 가을 날씨였다.

둘째 주엔 조금씩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이번 주는 초겨울 비가 종일 찔끔찔끔 내린다.

돌아갈 다음 주에는 아마도 눈이 내리겠지.

고작 한 달 머무는 내가 적응할 수 있는게 아니다.


불과 일주일 전, 이전 호스트가 나에게 날씨가 이 지경이어도 코펜하겐이 좋으냐고 물었을 때, ‘원래 비오고 추운거 좋아해’ 라고 대꾸했다. 그랬더니 걔가 ‘너 뭔가 시적인 분위기 좋아하는거야?’ 하고 놀리듯 말했었는데.. 이제야 철모르는 하룻강아지의 객기였음을 깨닫는다. 시적이긴 얼어죽을..

여튼 그러니까 이 험상궂은 날씨에 욕을 내뱉거나, 따뜻한 계절에 올걸 하고 후회하거나, 아무것도 하기 싫어 움츠러들게 되는 것까지 모두 그러려니 해야 한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내가 뭘 잘못 생각해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대자연(..)이 그런것 뿐이고

이런 감정들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부분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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