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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menade May 09. 2020

땅에 사는 영혼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_덴마크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벅차오르면 편지 한 줄도 쉬이 쓰지 못하고 끙끙 앓게 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의미를 깊이 헤아려 신중히 골라낸 단어로 써내려 가고 싶은 것들이 있다.

내게 그런 감정이 일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루이지애나 미술관이다.


처음엔 한나절이면 볼 수 있다 해서 느즈막히 찾아갔다가 폐장 시간까지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던 곳. 그 후 3년 뒤, 한 달간 여행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코펜하겐에만 머무르기로 결심했던 이유. 다시 3년이 흐른 지금도 눈 감으면 선명히 떠오르지만 기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가 되도록 오래 머무르고 싶다.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 이토록 강렬한 향수를 느낄 수 있을까.


 루이지애나는 코펜하겐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훔레백 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다. 덴마크 동쪽 해협에 인접해 있어 수평선 너머로 어렴풋이 스웨덴 땅이 보이는 곳. 역 주변 상점을 제외하고는 사람 사는 주택이라 늘 한적한 동네. 도로를 따라 산책하듯 쭉 걷다보면 덴마크식 삼각 지붕의 창틀 너머 사람들의 정겨운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루이지애나는 그 길 끝에 조용히 숨어 있다.


 입구의 작은 간판과 사람들의 행렬이 없었다면, 누군가의 집이겠거니 하고 그냥 지나쳤을지 모른다. 어딜 봐도 '모던'한 '예술' 의 느낌은 풍기지 않는다. 어리둥절했다. 과시하지 않는 것이 이 나라 국민성이라 하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이 이렇게 수수할 수 있을까.

 

 그 동안 경험했던 현대미술관들은 꽤 강렬한 이미지로 머릿 속에 남아 있다. 날렵한 직선과 광활한 면의 교차, 압도하는 공간감, 정교한 시각적 체계.. 미술관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예술품을 아우르는 상징이고, 그 자체가 현대 예술의 첨단처럼 느껴졌다.


 반면 루이지애나는 그 시작이 달랐다. 입구이자 미술관의 중심이 되는 건물은 옛날 한 가족의 저택을 개조한 것인데, 새로 지은 갤러리들과의 연결 외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온통 짙은 녹색의 담쟁이덩쿨로 뒤덮인 외벽, 닳고 닳아 반질반질해진 돌바닥, 이젠 창고로 쓰이지만 그 옛날 먼 길을 달려온 말들이 고단함을 풀었을 마굿간. 수 백년 간 거기 그대로 서 있는 건물은 처음 봐도 낯설지 않고 어디서 본 듯 아득하다.



 어떤 전시나 작품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갈 때, 미술관은 단지 목적지에 지나지 않았다. 당도해야 할 곳, 보려고 하는 것이 있는 곳. 때문에 압박감 까지는 아니어도 목적 의식은 분명히 있었고, 그것이 주변 환경과 시간을 경험하는 감각을 통제했다. 밀도있게 감상하는 집중력을 얻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눈 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경직되기도 하는 것이다.


 처음엔 루이지애나도 그런 목적지일 뿐이었다. 이 하나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갔고 낯설어서 긴장했으니까. 그러다 소박한 첫인상에 놀랐고, 완만하고 단순한 아치형 천장과 계단, 삐걱대는 나무 바닥과 낡은 벽에서 오래된 것들의 향기를 맡았다. 순간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고 시야가 트였다.


 루이지애나가 세워진 20세기 중반, 먹고 사는 문제가 여전히 다수를 위협하던 그 때에는 예술이란 돈 많은 상류층의 교양이자 사교 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루이지애나의 창립자 Knud Jensen도 상류층의 예술 애호가였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어떻게 경험하게 할 것인지를 고민했던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술적인 배경과 무관하게 보다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했고, 미술관 부지를 고를 때 호화로운 지역은 일부러 피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바닷가를 따라 산책하다가 우연히 이 고택을 발견했고, 한 눈에 반했다고 한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비밀스레 숨은 작은 호수, 오래된 나무, 소박한 저택..
마치 동화 속 황무지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이 땅의 특별한 분위기에 깊은 영감을 받은 그는 원래의 경관을 조금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미술관이 이 분위기를 오롯이 따르길 바랐다. 예술이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자연처럼 일상의 감동으로 다가가는 것이길 바랐다. 이런 그의 의도는 건축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이 되었다. 실제로 설계 초기 건축가들에게 요구한 첫번째 사항이 '저택을 미술관 출입구로 활용할 것' 이었는데, '소박하고, 편안하고, 조금은 괴짜같은 시골 삼촌 집에 온'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다. 처음 루이지애나를 봤을 때 느슨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전시가 이루어지는 갤러리는 저택을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날개처럼 길게 뻗어있다. 미술관을 만들 때 새로 시공한 부분은 바로 이 양 날개 부분이다. 오른쪽으로 뻗은 갤러리에는 분기별로 새로운 기획전이 열리고, 왼편으로 뻗은 갤러리에는 덴마크 출신 예술가들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어 있다.


  정원에서 바라본 갤러리는 저택이나 나무들보다 높지 않게 지면에 자박하게 붙어있다. 건축가들은 수 백년 간 뿌리 내린 커다란 나무들을 단 한 그루도 베어내지 않고, 설계 도면에 나무 자리까지 일일이 표기했다. 경사진 부지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았고, 그 단차를 활용해 어떤 곳엔 지층의 안정감을, 또 다른 곳에는 높은 조망을 만들었다. 때문에 미술관 전체 구조를 한 눈에 파악하긴 어렵지만, 미술관 안에서 바깥 풍경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작품이 설치된 여러 개의 세부 공간들은 긴 통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통로의 양 옆은 검은 프레임과 통유리로 되어 있어 외부에 완전히 개방된 느낌을 준다. 사방이 막힌 어둑한 공간에서 전시에 한껏 집중했다가, 다른 갤러리로 이동할 때면 지금이 몇 시인지, 날씨와 계절은 어떠한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모든 감각이 시원하게 정화되고, 한껏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이완된다.안으로 좁게 쏠렸던 시야가, 싱그러운 풍경을 향해 바깥으로 넓게 반전된다. 이 단순해 보이는 구조가 극적인 감정 변화를 일으킨다.


  깊숙히 쏟아지는 빛, 우직한 고목과 흩날리는 나뭇잎, 푸른 풀밭. 유리 너머 펼쳐진 풍경은 검은 프레임 속 하나의 그림과 같다. 길이 꺾어지는 모퉁이 사이로 배치된 조형들은 저마다의 작은 전시회를 연다. 해의 움직임과 날씨의 변화, 계절의 흐름 속에서 단 하루도 같은 모습이 없는 작품들이다.



숨쉬는 공간

 길게 뻗은 통로를 산책하듯 지나면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을 볼 수 있는 동쪽 갤러리가 나온다. 이 갤러리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세 개의 사각형 공간이 계단처럼 대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짧은 통로를 지나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갤러리가 각각 펼쳐지는 구조이다.


 통로를 지나 갤러리로 이동하는 중에, 왼편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예상치 못했던 풍경이 펼쳐진다. 하늘빛을 반사하는 고요한 호수, 터질듯 싱그러운 초록, 문을 열면 축축한 향이 넘실 올라올 것만 같은 생명력. 가장 널리 알려진 루이지애나의 얼굴, Lake Gallery다.


 200년 전, 덴마크 왕국은 습지였던 이 곳을 바다로 틔워 군함이 정박하는 항구를 만드려고 했었다가, 재정난으로 개발을 중단했다. 그 때 파낸 엄청난 양의 흙이 쌓여 지금의 미술관이 자리잡은 높은 터가 되었고, 웅덩이는 호수가 되었다. 사람이 파헤친 풍경은 시간의 더께를 입고 다시 자연이 되었다.

 

 창립자 Jensen은 갤러리 중 하나는 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건축가들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호수는 그 일부만 미술관 부지와 맞닿아 있어, 조망을 만들기 위해서는 건물이 향하는 방향을 제한해야 했다. 동시에 저택으로 이어지는 통로와의 연결, 바다를 조망하는 다른 공간과의 연결도 고민해야 했다. 또한 갤러리를 세울 부지는 둑처럼 솟아 있어, 아래 호수와의 단차도 고민이 되었을 것이다. 지면과 나란한 단층 건물을 쭉 이어 지었어도 호수는 멀찍이 내려다 보였을 테지만, 이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풍경을 끌어들이고 그 속에 사람들이 머무르길 원했던 것 같다.


 그렇게 둑에서 호수로 내려가는 가파른 빗면에, 호수의 정면으로 전진하는 3층 높이의 직육면체 공간이 설계되었다. 제한된 각도에 면적이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갤러리에 필요한 더 많은 공간들은 각각 분리되어 바다를 향해 배치되었다. 호수 반대편 앞뜰에 자리잡은 고목들과, 고사리가 자라는 작은 골짜기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건축가들이 남긴 수 십장의 초기 스케치들, 지웠다 그리기를 반복해 거뭇해진 얼룩에서 땅의 생김새와 기존 건물들 사이의 조화를 찾으려던 그들의 부단한 노력을 느낄 수 있다


 

 통로에서 아래로 걸어내려가면, 높은 천고와 유리벽으로 쏟아지는 빛에 압도감이 느껴진다. 하늘과 나무들 아래에서 잔잔한 호수의 바람을 맞는 기분이었다. 해질 녘 붉어지는 하늘이 수면에 반사되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모네가 이런 빛에 반해 <수련> 을 연작으로 그렸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반적으로 너무 강한 햇볕은 전시장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작품이 손상되거나 감상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지애나는 세상의 빛을 강하게 끌어안았고, 눈부신 역광 아래 선과 명암이 극대화되는 인체 조형물을 전시했다. 그 이름이 꼭 내 모습 같아서, 혼자 있어도 같이 있는 기분이 들었다.

Walking Woman_Alberto Giacometti


 루이지애나는 호수를 단지 바라보는 풍경에 그치지 않고, 그 속으로 뛰어들 수 있게 길을 내어 준다. 아이들은 미술관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한 달음에 내려갈 수도 있다. 호수 옆으로 드리워진 숲 속 오솔길은 투박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라,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딛으며 순간에 조용히 잠기게 한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이 숲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조형물만이 여기가 미술관이란걸 느끼게 해 줄 뿐.




마음의 여백

반대편, 그러니까 저택의 남쪽으로 뻗은 갤러리는 기획전을 위한 공간이다. 소장품을 상설 전시하는 동쪽 갤러리에 비해 에너지와 긴장감이 넘친다. 북적이는 인파 사이에서 전시에 집중하다 슬슬 피로해질 때 쯤, 막다른 길에 뜻밖의 풍경이 펼쳐진다. 어둠에 익숙해 진 눈으로 멀리서는 잘 가늠이 되지 않다가, 그 곳에 들어서는 순간 깨닫는다. 이 순간 내가 이 땅의 끝자락에 서서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진 깊고 차가운 북해의 바다, 그 검푸른 결 위로 느껴지는 바람, 점점이 흘러가는 흰 구름과 배들, 멀리 보이는 스웨덴 땅... 바다 건너 풍경은 늘 떠나온 자리를 생각나게 한다. 작품을 보며 상상 속에 빠져들었던 마음이 현실로, 그리움으로 바뀌는 순간. 마침 미술관에는 달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달은 동경의 대상, 잡을 수 없는 그리움이었고, 그 짙은 마음을 노래한 시들이 저 바다를 배경으로 걸려 있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서사가 또 있을까.

 

이 공간은 Panorama Room으로, 그 이름처럼 넓은 조망을 가졌다. 절반 이상이 유리벽으로 시야가 트여 있어, 낮에는 온통 푸른 물빛으로 가득 차고, 밤에는 낮게 드리워진 조명 덕에 희미하게 출렁이는 물결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창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소파에 앉아 전시 도록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고, 또 다시 창 밖을 멍하니 응시한다. 타인이 만든 난해한 창작물을 살피고 느끼느라 날 선 감각이 조금씩 풀어지고, 남은 전시를 이어서 감상할 몸과 마음의 여유를 얻는다.


근사한 풍경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음에 여백을 내어주기 위해 만든 곳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좋은

 루이지애나에 처음 갔을 때는 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바다가 펼쳐진 비탈진 잔디밭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어른들은 햇볕을 즐기며 수다를 떨고 있었고, 몇몇 꼬마들은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마음 급한 관광객에겐 이런 현지인의 여유가 부럽기만 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느끼게 되었다. 여유란 일부러 찾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리 되는 거란걸. 끊임없이 흔들리고 부서지는 빛과 파도, 구름, 나뭇잎..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아름답고 묘한 그 얼굴들. 비탈길 끝에 우두커니 앉아 바다 위로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예술은 자연을 경외하고 닮으려 하지만, 이렇게 살아서 변화하는 기운까진 담아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을 등지고 앉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웃음이 났다.  


 해가 긴 여름철에는 풀밭에 앉아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웃통을 벗고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고, 그러다 지루해지면 바다로 풍덩 뛰어들 수도 있게 개방된다고 한다. 루이지애나는 점잖게 교양을 쌓는 시설이 아니라, 소중한 이들과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열린 공간이 되어준다. 그림이든 조각이든, 산책이든 물놀이든, 감동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 끌어안겠다는 듯이.




Genius Loci

 루이지애나 건축에 참여한 이들은 이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고대 라틴어로 '땅에 깃든 정령'이라는 뜻인데, 숲이나 골짜기, 거리마다 그 장소를 지키는 초인적인 존재가 살고 있다는 믿음이란다. 이 단어는 현대에 와서는 어떤 장소만의 고유한 특성을 지칭할 때 쓰인다. 장소가 갖는 물리적인 특성과, 빛이나 소리, 분위기, 역사처럼 보이지 않는 요소가 결합된 그 무엇이다.


 루이지애나에는 그만의 고유한 특성이 가득하다. 석기 시대 해안가의 가장자리에 다져진 높은 땅, 파도치는 소리, 바다 건너 어렴풋이 보이는 스웨덴, 1800년대에 만들어진 작은 호수, 하얀 벽돌로 만든 소박한 저택, 옛 주인이 먼 나라에서 옮겨 심고 아끼던 나무들..


 Jensen은 이 땅을 완전히 뒤엎기보다 그가 첫 눈에 반한 'Genius Loci'를 지키기로 결심했고, 이 땅이 가진 생김새와 분위기, 이야기들은 수 십년간 진행된 건축 전체를 관통하는 원칙이 되었다. 건축가들 또한 그들의 산출물이 별 특색 없더라도 오직 이 땅 만을 위한 것이기를 바랐다. 미술관을 설계하고 짓는 과정은 수 십년 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지만, 이러한 의지 하나로 각 부분이 전체와 연결되고, 전체가 이 땅에 강력하게 연결될 수 있었다.


이 땅의 분위기를 오롯이 담아내자
건축은 세상 단 하나 뿐인 것이 되었다





  달에 대한 전시를 보고 밖으로 나왔더니,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리지 않은 하늘에 거짓말처럼 하얀 달이 말갛게 걸려 있었다. 그 창백하지만 따스한 빛이 잔잔한 물결에 부서져 바다가 온통 반짝거렸다. 수 많은 작품 속에 담겨 있던 아득한 이야기들이, 숨을 쉬고 움직이는 생명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느낌이었다. 마음 깊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황홀함이 가득 차올랐다. 사람이 만든 것과 자연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아름다울 수 있음에 깊이 안도했다.


이 땅에는 해쳐지지 않은 영혼이 살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간직된 이야기가, 피고지는 계절이, 아름다움에 감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낸 영혼.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늘 마음에 남아있고,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듯 하고, 계속해서 가닿고 싶은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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