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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menade May 18. 2020

이사 전날 밤

이 곳에 앉아 글을 쓰는 마지막 시간

내일이면 이사를 한다.


몇 해 전, 도망치듯 혼자 살 곳을 찾으러 나설 때 내게는 특별한 바람도 선택지도 없었다.  일터에서 멀지 않고, 당장이라도 들어가 살 수 있으며, 철저히 혼자일 수 있도록 익명성이 가득한 곳. 그렇게 한 시간만에 지금의 오피스텔을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짐을 싸다 넣고, 일단 살고 보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3년이 지났다.


처음 살아본 오피스텔은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사는데 필요한 것들이 작은 공간 안에 치밀하게 들어차 있는 곳. 옷장이며 책장, 세탁기, 냉장고, 이 모든게 네모 반듯하게 블럭처럼 짜맞춰져 한 치도 낭비가 없다. 거기에 나와 내 짐들을 간단히 끼워넣으면 그만이다. 나와 어떤 관련도 없이 이미 들어차서는 자기들끼리 완벽한 정합성을 자랑하던 사물들에 나는 어떤 감정도 갖지 못했다. 좋지도 싫지도 않고, 바꾸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 것들. 내 공간이라지만 정작 끝까지 어울리지 못한건 어쩌면 내 쪽이 아니었을까.


 예상치 않았던 이사가 결정되었을 때에도 아쉽지 않았다. 재고 따질 것 없던 간단한 시작이었으니, 마지막도 그러하겠거니 했다. 내가 나가면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와 비슷한 배치로 물건을 두고 비슷하게 움직이며 살아가겠지. 이 네모네모한 공간에 더 나를 끼워맞추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후련했다. 


 오늘 재택을 하다 문득 창 밖을 바라 보았다. 벽처럼 가로막고 서 있는 아파트, 내가 일하는 회사, 사는 동안 한 번도 끊인적 없던 신축 공사 현장들, 밤낮으로 차가 드나드는 지하 차도. 그 사이로 조각난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걸쳐 있었고, 반대편으로 저물어가는 해가 아파트 유리창에 붉게 부서지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 바로 이 자리에, 이 방향으로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참 많았다. 따가운 아침 햇살, 떨어지는 빗방울, 폭풍처럼 휘날리던 눈, 아파트 사이로 숨바꼭질하듯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았다. 책을 읽다 목이 꺾인 채 낮잠을 잤고, 이것저것 다 싫을 때는 축 늘어져 있었고, 물끄러미 가로등을 바라보다 울기도 했다. 딱 한번 엄마를 졸라 집에 데려온 날, 엄마는 얼굴에 팩을 붙이고 이 자리에 편히 기대 앉으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게 좋았다.


 그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는 한 번도 빠짐없이 모두 설레었다. 주방이라 할 것도 없는 작은 싱크대 앞에선 서로 설거지를 하겠다며 늘 실랑이를 벌였고, 부족한 화력에 모카포트로 어떻게 하면 커피를 잘 만들 수 있을지 진지하게 얘기했다. 비가 시원하게 내리던 날, 눈발이 휘몰아 치던 날에는 나란히 서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모르는 세상으로 그를 돌려 보낸 뒤, 매운 눈물을 식히던 서늘한 산책들도 떠오른다. 


 머물다 떠나온 공간들...궁여지책으로 어설프게 살던 곳, 욕심껏 꾸미고 살던 곳, 여러 명이 부대끼며 소란 스럽던 곳, 함께였지만 줄곧 외로웠던 곳. 굵직한 변화가 찾아올 때마다 나는 떠났고, 떠남으로 인해 그 곳에서의 시간들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이전에 가졌던 감정과 습관들은 새로운 공간에서는 더 이상 재연되지 않았다. 그러한 단절은 나빴던 기억을 잊게 하고, 좋은 것들은 한 때의 추억으로 만들어, 모조리 시간의 뒷편으로 흘려버렸다. 만약 떠나기 전 그 공간을 뒤돌아보게 된다면, 내 일부이던 것들이 완벽한 과거로 변해버리는 순간임을 어렴풋이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시점에 뿜어냈던 강렬한 감정들, 조용히 흘려보낸 사소한 감정들 모두 집안 구석구석 말라 붙어 나를 감싸고 있다. 낯선 곳으로 떠나려는 이 순간 가장 애틋한 것은 사물도 풍경도 아닌 그 향이다. 그 안에 머무르는 동안 느낄 수는 없지만, 작은 기억의 조각도 선명하게 꺼내어 주던 향. 

이제 그 향을 다시 맡을 수 없게 되면, 나는 얼마나 많은 기억을 잃어버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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