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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코펜하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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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menade Oct 18. 2018

떠나온 이유

"코펜하겐에서 한 달이나요? 되게 심심할텐데.."


몇 년 전 코펜하겐이 그렇게 매력적이라며 환상을 심어준 후배가 내 여행 소식을 듣고 처음 한 말이야.

틀린 소린 아니지. 이 아담하지만 비싸 쳐먹은 도시에서 볼 거 다 보는데 일주일, 그 이상은 버티기에 가까울테니까.


"그냥. 저번에 다녀 온 후로 언젠간 다시 가봐야지 싶어서.."


여행이라기엔 목표도 없고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어. 그냥 여기 오고 싶었던 것 말고는.

물론 도시 구석구석 아무데나 덕지덕지 묻어있어 더 놀라운 디자인 센스와, 맞바람에 자전거를 타도 흐트러짐 없는 코펜하겐 사람들의 간지는 14시간 비행기 타고 와서 볼만해.

그치만 그 이상으로 나를 강하게 이끌었던건 무엇이었을까.


누구보다 나를 가까이서 봐 온 너는 잘 알거야. 내 인생이 최근 몇 해 사이에 얼마나 요동쳤는지..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냐고 수백 번 되물었던 그럴싸해보이던 일상을 제 손으로 부셔버렸지만, 내가 원했던 삶에 대한 답은 정작 그 속에 없었어. 핑계일테지만 그렇게밖에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반대로 대안을 찾으려면 또 다르게 살아 볼 수 밖에 없는 걸거야.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될대로 되란 식의 저지르는 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교묘하게 나를 안주시키던 커다란 틀을 깨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찾아온 건 자유가 아닌 또 다른 불안이었어. 그리고 그 불안은... 해치웠다고 생각했던 그 틀을 무섭게 빼닮았지.


 나는 여전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서투르고, 그걸 늘 상황 탓으로 돌려. 내키지 않지만 해야 한다, 뭐든 맘먹으면 해낼수 있다,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의지 혹은 오만함으로 인생에서 나를 얼마나 소외시켜 왔는지..


그렇게 아무렇게나 치닫으면서 정작 내 안에 채운 것이 조금도 없을 때의 절망감, 그걸 또 만회해보려는 쓸모없는 노력들. 그게 나의 굴레야.


그건..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란걸 최근에야 알았어. 내게 충만함을 주는 것들이 뭔지 모르니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대부분의 삶을 의미 없이 보내온거지. 어쩌다 정말 운좋게 찾은 단 하나의 의미에 지나치게 기대기도 했고.. (넌 아니라고 하겠지만 네 얘기야. 무겁게 한 것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언젠가 읽은 책 중에 습관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나.

뭐라더라.. 몸짱이 되고 싶으면 지금 당장 팔굽혀펴기 한 개만 하라고. 그렇게 내일도 한개, 모레도 한개, 일주일 지나서는 열 개씩, 더 익숙해지면 서른 개 씩.. 뭐든 쌓이고 또 쌓이면 바라던 모습이 된다는 얘기야. 자기계발서였는데, 역시 뻔하지?


근데 굳이 목표가 없더라도, 하루 중에 잠깐 보낸 소소한 순간들이 쌓이면 나를 설명해주는 뭔가가 된다 생각하니 다르게 와닿더라구.


무작정 오랫동안 걷기를 좋아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화분 잎사귀에 물을 뿌린다.

왠만하면 일주일에 두 번은 필라테스를 한다.

사랑하는 이와 마주앉아 나누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가장 즐거워한다...


다른 누군가의 누구, 또는 어떤 일을 한다는 수식어보다도 이런 일상적인 것들이 나를 더 잘 말해준다고 생각해. 내 기쁨과 괴로움, 아름다움과 추함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일상의 순간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 번 쯤은 전혀 다른 일상을 채워보고 싶었어.

낯선 도시에 잠깐 머무는 이방인의 하찮음으로 무겁기만 했던 존재감을 털어버리고, 어제의 기분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을 일도 없이 말야. 모든 것으로부터 동떨어진 하루를 덤으로 살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시간과 방식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진 않을까.


"됐어 뭘 하려고 하지마. 그냥 멍 때리고 놀다와."


떠나기 전날 너는 내게 이렇게 말했지.

이런 생각들 조차도 나를 쉬지 못하게 할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었을거야.


하지만 난 열심히 생각해.

모든 후회나 절망, 괴로움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은 것이 아니라, 내가 즐겁고 편해질 수 있는 과정에 대해서..그리고 그건 몸을 움직이다보면 알게 되겠지. 여기서의 생각이라는건 그저 이리저리 부딪힌 후에 찾아오는 잠깐의 느낌을 언어로 되새겨보는 것에 불과할거야.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제멋대로 달려나가고 호흡이 얕아질 때면 그 순간 너를 떠올려. 그리곤 감각을 되찾아. 그러면 낮잠 자는 고양이의 쌔근쌔근 숨쉬는 소리가 들리고, 뒹구는 낙엽들 하나 하나에 얼마나 다른 모양과 색깔이 깃들었는지 선명하게 보여.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나를 차오르게 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나에게 그토록 선물해 주고 싶었던 시간이 이런 것이었구나, 절실히 느끼고 있으니까.


나는 그냥 여기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떠나온 이유일거야.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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