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반복되는 일들이 없다면,
훗날의 나는 지금의 나를 무엇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만약 매일이 생각지 못한 낯선 이벤트로 채워져 365일이 저마다 아주 다른 모습을 띈다면 말야.
아마 기억력이 나쁜 나는 늙어서 지금의 나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스웨덴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지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특별했던 일보다는 작지만 수없이 반복했던 일상이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어.
읽히지도 않는 논문 잡고 몇 시간씩 씨름하던, 계피빵과 라자냐가 맛있던 촌스러운 카페에서의 시간들
친구네 가는 길에 울창하게 뻗어 있던 큰 나무와 키보다 높이 쌓인 눈, 그 사이로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오갔던 날들,
수업 듣던 인문학과 건물 옆에 있던 묘지 사이를 걸으면서, 그 앞에 놓인 꽃들, 촛불, 그리움의 편지들, 살아생전 얼마나 아름다운 이였기에 죽어서도 이토록 사랑받는걸까 상상해보던 시간들..
십 년 후 다시 그 도시를 찾아갔을 때 그 기억이 너무 또렷하게 떠올라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어.
근데 그때는 그게 잘 못 지내는거라 생각했어.
그 먼 곳까지 어렵사리 가서는 특별한 경험 없이 하루를 그냥 보내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늘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고, 어쩌다 이벤트라도 있는 날엔 조바심에 오히려 잘 즐기지도 못했지.
나중에 그 별거 아닌 평온한 일상을 그리워하게 될 줄 알았다면, 사소한 것들을 충실히 해볼걸.. 그런 아쉬움이 계속 나를 이 춥고 더럽게 비싼 동네로 자꾸 이끌었던건지도 모르겠어.
여기 남겨둔, 못다한 일상의 궤적이 조금이라도 더 진하게 내게 새겨지길 바라면서..
그래서 지금 여기서 내가 특별히 챙기는 짜친 일들은 이런거야.
아침에 눈 뜨면 연하게 탄 커피 마시면서 잠 깨기
잠 깨면 운동복 갈아입고 공원 가서 조깅하기. 이틀에 한 번은 근력운동도 하기
집에 돌아와서 샌드위치 만들어서 브런치로 든든하게 먹기
느긋하게 씻고 해가 중천에 뜰 때 밖에 나와서, 새로운 구경은 하루에 한 군데만 하기
해질 녘 노을이 잘 보이는 곳에서 어두워질 때 까지 하늘 바라보기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글쓰거나 그림 그리기
이렇게 하루의 틀을 잡는데까지 꼬박 일주일이 걸렸네.
처음엔 여느 여행객처럼 들떠서 쉴 새 없이 사진찍고 어디 갈지 계획 세우고 그랬는데, 어제 완전 큰 사건을 치르고 나니 마음이 싹 가라앉았어. (자전거 도둑이라니 이 잘사는 나라에서!)
속상한 마음에 피자 한 판에 맥주 두 캔 까고 인디밴드 한다는 집주인이 자기 LP 신나게 틀어주니까 '아 여기라고 별건가. 그냥 다 사람 사는데지' 싶어서. 날아다니던 마음도, 푹 꺼진 기분도 다 가시더라고.
(하지만 코펜하겐에 35년 살아온 집주인 말로는 자긴 30번 넘게 잃어버렸대. 남의 불행을 듣고 결정적인 위로를 받았지 ㅋㅋ)
그래서 오늘 아침엔 좀 더 오래 달리기를 했어.
비온 직후라 풍경이 좀 더 짙어진 느낌이었는데, 사진은 안찍고 그저 가만히 바라봤어.
그리고 지금은 동네 카페에 앉아서 맘 편히 별거 아닌 얘기들을 늘어놓고 있고.
이제 조금 더 편해진 것 같지?
대개는 여행에서 일상과 다른 무언가를 꿈꾸지만..
내가 추구하는 건 새로움보다 깊이였던 것 같아.
그게 여행이든 사람이든 뭐든.
전혀 모르는 새로운 것이 주는건 낯설음과 놀라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피상적인 첫인상만 쌓여갈때 오히려 피곤을 느낀 적도 많았어.
그치만 무언가를 조금씩 알아가고 익숙해지는 시간을 들일 수 있다면.. 날마다 달라지는 빛깔과 향기에 천천히 빠져들고, 어느 순간 내 일부가 되어있는걸 발견할 때가 있어. 그게 진짜 놀라운 경험이지.
너와 내가 오랜 시간을 두고 서로를 알아가고 마침내 자신의 일부로 여기게 된 것처럼 말야.
나는 여기서 내가 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일상을 연습해 볼게.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챙기는 힘이 길러지면 나도 내 삶을 좀 더 사랑하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