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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라키 Oct 24. 2021

슬로우 스타터

드라마는 반전이고, 스포츠는 역전이 묘미니까

난 슬로우 스타터(Slow-Starter)다. 사전적인 의미나 통용되는 의미와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내 생각에는 그렇다. 다르게 말하면 그냥 시작이 느린 아이라고나 할까.


어릴 때부터 나이가 들어서도, 시작은 항상 남들보다 조금씩 느렸던 것 같다. 처음 해보는 것도 익숙한 듯 뚝딱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난 새로운 뭔가를 이해하고 시작하는 데 있어 준비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그게 몸을 쓰는 것이든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든.


내 방식의 문제겠지만은 새로운 분야의 정보들은 잘 모르기 때문인지 아무리 체계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해도 파편적으로 남는다. 그렇게 계속 쌓이게 되면 양은 많아져도 겉도는 느낌이 들고 자리를 잡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서로 연결고리가 생겨 나면서 갑자기 쑥 하고 내려앉는다. 그제야 답답함이 조금 사라지고 편안해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그 전까지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매우 싫어한다. 시간이 필요한 걸 알면서도 그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이 모순적인 성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결국 나였고,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결국 둘 중 하나였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거나 깔끔하게 포기하거나.


그래서 일단 시작하면 남들보다 조금 더 준비하고 연습하고, 결국엔 어쨌든 뭘 해도 남들이 하는 만큼의 이상은 할 수 있게 됐던 것 같다. 하지만 점점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고, 때로는 포기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할 수 있는 건 많고 더 잘하는 걸 다시 하면 되니까. 이전의 경험들이 절대 헛되지 않다는 것도 경험상 알고 있다. 물론 받아들이는 건 아직도 힘들다. 그래서 가능하면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하고, 실패할 걱정에 시작조차 못하는 경우도 꽤나 있었던 것 같다. 나 스스로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슬로우 스타터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좋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부분도 크다. 결국엔 결과가 좋아야 과정도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결과 지향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결과가 좋아야 슬로우 스타터라는 수식어도 생기게 된다. 시작도 부진한데 시간이 지나도 성과가 없다면 사람들은 무능력으로만 평가하게 될 테니 말이다.


전반적인 인생에서 보자면 아직 나는 뭔가를 이뤘다거나 내세울만한 건 없는 게 사실이다. 그저 평범한 직장인 중의 한 명일뿐이고 심지어 그 직장생활 조차 남들보다는 조금은 느렸다. 하지만 아직 평가를 받기엔 이르다. 일단 시작은 했고 다른 그 무엇들처럼 시작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계속될 예정이다. 슬로우 스타터라고 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분명 언제나 그랬듯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쓸데없는 근자감이 아닌가 싶어 보이기도 하겠다만, 아무렴 별 상관없다. 이런 근자감이 때로는 훌륭한 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혹시나 지금 당장 남들보다 늦은 것 같아 걱정인 누군가가 있다면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고 경기를 거듭할수록 숨겨진 실력은 나오기 마련이라고. 결국엔 슬로우 스타터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포기하지 마 아프면 아픈 얘기
그 모든 순간순간 나만의 이야기야
멈추려 하지 마
분명 날아오를 기회가 와 좀 늦더라도
내 눈가의 주름 깊은 곳엔 뭐가 담길지
궁금하지 않니 답은 조금 미룬 채
지금은 조금 더 부딪혀봐

- 'Slow Starter' 노래 가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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