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잘 모르겠는
일의 의미라, 누군가 물어보면 어딘가 있어 보이는 그럴듯한 정의라도 하나 내놔야 할 것 같은 말이지만 생각해 보면 역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먹고살기 위해서'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거나 일이라는 것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면야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에게는 일의 의미가 삶에도 영향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일의 의미란 무엇일까, 하고 잠시 고민하는 척 고개를 돌려 보자니 머릿속이 또 복잡해진다. 일의 의미는 잠시 미루더라도 어쨌든 가능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어차피 하는 거 이왕이면 잘하고 싶었달까. 구체적으로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에 대한 오랜 고민은 잠시 내려놓고 지금 하는 일,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잘 하자라는 게 꽤나 오랫동안 가져왔던 나의 현실적인 계획이자 목표였다. 소위 말하는 밥 값은 하자는 말을 난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이것도 막상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일이야 항상 차고 넘쳐서 문제지만 '잘' 한다라는 건 다른 이야기다. 잘하기 위해서는 잘하는 일만 할 수 있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가장 쉬운 방법이겠다마는 모든 걸 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잘 해지기 위해서는 그 전까지의 과정도 분명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지루하고도 때로는 힘든 과정을 반복하고 지속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 됐든 이런 과정을 잘 견뎌내고 잘 해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글을 다시 쓰다 보니 아마도 그게 일의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말장난 같지만 나에게 그 무언가는 잘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잘하고 싶은고 하면 해야 할 이유와 의미가 명확한 일들이다.(그저 내가 하고 싶다거나 재미가 있다거나 하는 단순한 이유도 포함해서) 그래서 왜 해야 하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이해하는 건 어떤 일을 시작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게 납득이 가지 않으면 방향을 잡기도 어렵고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애를 써서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해도 그 노력에 비하면 효율이 매우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쌓여가는 스트레스는 상당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모든 일에 대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혼자 하는 일도 아닌 데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고객만족을 우선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일하는 입장에서 보면 고객을 가장한 위로 옆으로 포함되는 대상이 한둘이 아니고 이들 각자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데다 제대로 전달도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생각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게 무언지도 모를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몰려온다. 결국 어떨 때는 '내가 지금 이 일을 왜 하고 있지?' 하는 의문을 갖고 억지로 하고 있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너무나 힘들다. 그리고 결국 내가 밥 값은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대답이 No가 나온다면 그땐 그만두어야 할 때다.)
비슷한 맥락에서 난 야근을 매우 싫어한다.(나와 일을 해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물음표를 띄우며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 마치 공부를 안 하다가 시험 전날 밤을 지새우는 느낌이랄까. 물론 필요한 순간도 있기는 하지만 시험 기한 내내 이어진다면 그건 결국 평소의 내가 부족했다는 반증일 뿐이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졸업 전부터 시작된 10년 가까운 회사 생활 동안 야근을 안 한 곳은 없었다. 날 수로만 따져도 안 한 날보다는 한 날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할 거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동안 내가 생각하는 야근에 대한 의미는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 내가 생각했던 야근은 의미 없는 일로 채우는 시간들이었다. 물론 이를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는 그저 개인적인 기준이다. 보통 개발자라고 하면 회사 일 말고도 기술에 관심을 갖고 공부도 하고 토이 프로젝트라도 하나 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찐 개발자인 것 같고 주위에서도 많이 들리는 이상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뭐랄까, 난 선천적으로(?) 그런 게 잘 되지 않는다. 물론 가끔은 그럴 때도 있지만 어쩌다 하고 싶은 게 생겼거나 궁금한 게 생겼을 때 잠깐이다. 그다지 오래가지 못한다. 그 외에는 주로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것들을 이어간다. 그래서 퇴근하고 나서나 주말에 컴퓨터를 켠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난 전혀 거부감이 없다. (당연하지만 잘하고 싶은 일에 한해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야근에 해당한다. 이런 일은 얼마를 준다고 해도 절대 하고 싶지 않다. 현실은 마음 같지 않지만.
물론 이런 생각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졸업 후 신입으로 들어간 첫 회사에서의 경험이다. 이제 막 배치를 받은 신입이 하는 일이라고는 시키는 테스트나 심부름 좀 하다가 가끔 커피 마시러 따라 나가고 남는 시간엔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척 멍 때리기 정도였다. 하지만 난 밥값을 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불안한 병이 있다. 그래서 언제 할지 모르는 일을 조금이라도 알아두고 익숙해지기 위해 퇴근이 지나고서도 자리에 남아 있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에 한참이나 어린 동기가 농담 삼아 한마디 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인터넷에 떠돌던 글을 보고 비슷하게 했던 것 같다. 그 글의 내용은 이렇다.
프랑스로 이민 간 한국인이 매일같이 혼자 야근을 했다고 한다. 그를 본 팀장은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며 다그쳤다. 한국인은 반문했다.
"내가 열심히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덕분에 당신 성과도 좋아질 거 아니냐"
팀장은 그를 꾸짖었다.
"너는 지금 우리가 오랜 세월 힘들게 만들어 놓은 소중한 문화를 망치고 있다. 너를 의식한 누군가가 저녁이 맛있는 삶과 사랑을 주고받는 주말을 포기하게 하지 마라."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긴 했지만 한동안 퇴근하고 혼자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을 내게 한 동기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이후로 바빠서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는 웃픈 이야기다.
의미 없는 직장생활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거나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라는 말들에 어느 정도 공감도 하고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는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어떤 방식이든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리 현실적이지 않은 말인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정답 없는 질문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인 데다 오랫동안 묵혀둔 글에 덧붙이다 보니 글은 길어지고 요점 없는 글이 된 것 같다마는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의 나를 기록한다는데 의미를 부여해 본다. 어느새 한 해의 끝이 다가오고 있어서 인지 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밥 값은 하고 있는지 자주 되묻게 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