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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라키 Dec 12. 2021

예민 보스 집돌이

또 주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내 주말은 거의 정해진 루틴을 따라 지나갔다. 토요일은 운동을 갔다 오고 일요일은 피곤하니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책이나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향한다. 운동이야 정해진 시간에 강습이 있기 때문에 거르거나 하는 경우는 웬만해선 발생하지 않지만 의지가 필요한 일요일은 가끔 예외가 생긴다.


이번 주 토요일도 어김없이 운동을 다녀왔고 일요일이 됐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밀린 집안일을 적당히 하고 점심을 챙겨 먹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옷까지 다 챙겨 입고 창문을 열어 밖을 한 번 내다본다. 그러고 있으니 머릿속에서 누군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날이 많이 춥네", "오늘은 그냥 집에 있는 게 어때?", "지금 시간이... 나가면 얼마 못 있다 다시 들어와야 하는데?"...


생각의 꼬리를 이어가면서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다가 결국은 입었던 옷을 다시 벗어놓고 의자에 앉았다. 약간의 허무함과 함께 편안함이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돌이였던가?"


지금껏 한 번도 내가 집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래전 언젠가의 기억 속에도 누군가 물었을 때 딱히 외향적이거나 밖에 있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집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도 가만히 누워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절대 집돌이는 아니라는 대답을 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오늘 같은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처음도 아니었고, 상반되는 상황들이 머릿속에 줄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이런 경우다. 모처럼 주말에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라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약속 몇 시간 전 일이 생겨 약속을 취소하는 연락이 온다. 아쉽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혼자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생각에 이상하게도 마음은 더 편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다. 항상 주장(?) 해 왔듯이 난 사람을 좋아한다. 다만 혼자 있는 시간이 좀 더 편하고 필요할 뿐이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혼자 있을 때 충전이 되기 때문이다. 밖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하다 보면 분명 즐겁다. 모처럼 대화가 잘 되는 사람들을 만나면 아침에 만나 밥까지 먹고 카페를 3차까지 이어가면서 하루 종일 떠들다 헤어져도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어김없이 혼자서 한참을 걷다가 들어오곤 했다.


또 비슷한 맥락으로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정제되지 않은 소음에 취약한 편이다. 자리를 지키는 건 가능하지만 머리는 울리고 정신은 이미 멍해져 있다. 가만히 있어도 에너지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소진된다. 얼마 전에도 암장에 행사가 있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운동은커녕 정신을 붙잡고 있기도 힘들었다. 결국 사람들이 어느 정도 지나간 뒤에 뒤따라 문제들을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강습을 같이 듣던 누군가 나에게 왜 이리 몸을 사리냐며 한 마디 했지만, 그건 몸이 아니라 정신을 붙잡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런 게 집돌이 성향과 관계가 있는 걸까? 그렇다고 항상 집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운동은 전혀 거부감 없이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데?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가 문득 든 의심에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아니라는 증거가 나오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그러나 찾으면 찾을수록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만 쌓여갔다. 맙소사.


하지만 아직 인정할 수 없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집순이 집돌이의 특징 같은 류의 정보들은 왠지 믿음이 잘 안 간다. 심리학이나 의사들의 말처럼 좀 더 전문적인 내용이라면 왠지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결국엔 인정할 수밖에 었었다. 난 집돌이였다. 더 정확하게는 예민 보스 집돌이. 어째 나오는 내용들이 하나같이 내 얘기인 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런 집돌이 기질 자체가 예민함 때문이라고 한다. 계속 보다 보니 자연스레 수긍이 됐다. 이 알 수 없는 패배감이란...


공감 갔던 내용들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다 다르고 그 에너지가 채워지고 소모되는 원인도 다르다. 예민함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살아온 환경이나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 발생되기도 한다.

예민한 사람들이 대인관계에서 피로한 이유는 대화에서 텍스트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의 표정이나 말투, 상황 등을 같이 받아들이다 보니 남들보다 정보가 과다하게 들어오고 그걸 처리하려면 에너지 소모가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민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답답하다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가 발생시키는 노이즈의 필터링이 안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 예민한 기질을 잘 관리하면 완벽주의 성향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에너지가 떨어지면 아끼기 위해 대인관계를 줄이기도 한다. 그래서 점점 집순이/집돌이가 되어 간다.

주의할 것은 그렇게 가만히만 있는다고 충전이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예민해서 하게 되는 생각들이 또 에너지를 고갈시키기 때문에 이를 위해 삶의 리듬을 유지해야 하고 각자 자신에게 맞는 안전 기지(secure base)를 만들어야 한다. 안전 기지는 사람이나 동물, 운동이나 취미 같은 것들이 될 수 있다.

애초에 예민한 성격인 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다행이라면 부분 부분이지만 내 리듬을 유지시켜주는 루틴들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름의 안전 기지도 있었는데 그게 바로 운동이었던 것 같다. 몸은 힘들어도 운동을 하고 나면 정신적으로는 편해지곤 했는데, 그래서 지칠 때면 오히려 더 운동을 찾았던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거부하기 위해 한참을 물고 늘어지다 보니 결과적으로 더 받아들이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됐지만 이렇게 또 나에 대해 하나 더 깨닫게 됐다.


그래서 이제는 누가 물어보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저 집돌이 맞아요. 예민함은 패시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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