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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 Lee Mar 07. 2017

졸업식 답사

무어라 불릴 것인가

이 글은 졸업식 답사를 위해 썼던 글입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구어체를 하고 있고, 사적인 부분은 생략/편집하였습니다.



(생략)


    삶의 국면이 전환될 때, 우리는 두려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느끼곤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감정들을 축복하고 어루만지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선 이 뜻 깊은 자리에 함께 해주신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교직원 여러분, 재학생과 졸업생,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 이하 내외 귀빈 여러분께 졸업생들을 대신하여, 한편으론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학우 여러분, 저는 이 "대표한다"라는 말이 얼마간 의구심을 자아낸다는 점 또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단지 제가 여러분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거나(실제로 그런 사람이 아니긴 합니다만), 또는 그것이 수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는 우리 각자의 개별성이 다른 무언가에 의해 대표될 수 없으며, 또 우리 자신이 이를 용납해서도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어왔으며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무수히 경험하게 될 사회라는 구성체는 우리의 존재가 다른 단순명료한 이름으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이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여태 누군가의 딸/아들이었고, 연인이었으며, 학생, 국민, 알바생, 인턴 등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거의 이름들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호명될 이름들이 더 많을 것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절차는 표면적으로는 우리의 신체적/정신적 번거로움을 해소하고, 사회적 톱니바퀴에 윤활유를 제공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편리에 대해 재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누군가를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대체함으로써 가능했고, 우리 또한 우리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불가항력적으로 어떤 이름이어야만 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어떤 "이름"에 불과하지 않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저항적인 측면을 구성해왔을 것입니다. "자식은 왜 그래야만 하죠?", "학생은 왜 그래야만 하죠?", "알바는", "남자는", "여자는", "나는 왜 그래야만 하죠?" 이 같은 저항적 물음들 중 몇 가지에 대해 우리는 이미 익숙할 것이며, 이는 그 같은 이름들로 불리는 실질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떤 수준에서든 부당함을 느껴왔음을 보여줍니다. 재밌는 것은 이와 관련하여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점입니다. 즉 우리는 호명되는 자이면서 호명하는 자이고, 저항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저항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알바답기를 거부하면서 알바답기를 요구하고, 여자 혹은 남자답기를 거부하면서 그러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자기치유가 불가능한 불행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불행은 지난 제 삶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끊임없이 사회의 가치체계에 망치를 들라는 니체 등의 말을 지면에 옮겼으나, 실제 상황에서 제 시선은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구별하고, 제 몇몇 가지 습관들을 매 시간 제게 부여된 이름들에 알맞은 방식으로 변화시켜 왔습니다. 제가 무엇보다 열정적으로 연구해온 것들이란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 때, 어떤 방식으로 밥을 먹을 때, 어떤 식으로 걸을 때, 노래할 때, 공부할 때 주변인들은 나에게 "잘했다."라고 말해주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연구 성과는 놀라웠습니다. 친구가 생겼고, 교사는 나를 응원했으며, 행인은 내게 친절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들로부터 분노를 사지 않았고, 저 또한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즉 모든 관계가 편리하고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삶의 아이러니함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즉 그러한 관계들은 오히려 저를 외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저는 웃음지은 것이 아니라 웃음을 연기하였고, 눈물 흘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시하였습니다. 단지 그때그때의 이름에 걸맞게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그러한 불행의 실상이 미래의 행복과 그 방안을 짐작토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간단한 공식이란 자신과 서로에 대하여 호명하곤 했던 부가적인 이름들을 소거해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서술적으로는 간단한 것이지만, 실천적으로는 너무나 낯설고 부담스러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일이 남들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스스로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오늘이 지나면 우리는 하나의 이름으로부터 잠정적으로나마 탈출할지라도, 보다 실제적인 사회에 던져짐으로써 보다 많고 굳건한 이름들에 현기증을 겪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 적어도 나 자신은 스스로를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직 나로서만 인식하고 응원한다면, 나와 타자에 대하여 모순적이지 않게 되고, 비로소 꽃이 되어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이상 사회나 국가, 자본, 제도 등이 여러분을 어떤 다른 가치로 대체하려 할 때에 굴복하지 마시고, 자신만의 가치를 생성하는 가운데 행복하고 사랑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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