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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콩 Jan 23. 2024

눈 오는 날이 싫다

폐렴으로 입원한 아이, 퇴원하는 날


 눈 오는 날이 싫다.

어려서는 산 밑에 살아서 눈만 오면 고생하던 것이 지겨웠다.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는 눈은 생존에 직면한 문제가 되었다. 폭설이 내리는 고속도로에 갇혔던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게다가 지난겨울 빙판길에서 교통사고가 난 이후로 눈은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언제나 눈 내리는 계절은 돌아온다.


  아이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들어갈 때는 멀쩡하던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폐렴으로 입원한 아이와 내내 병원 안에 갇힌 지 꼬박 5일째였다. 퇴원허락을 받고 신나게 짐을 챙겨 나왔는데 차에 짐을 싣기는커녕 열 수도 없었다. 며칠간 내린 눈이 이불이 되어 차를 덮고 있었다. 쩍쩍 얼어붙은 문을 열고 들어가 시동부터 켰다. 열린 문틈 사이로도 눈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이를 병실에 두고 혼자 내려와 차의 눈을 치웠다. 차 안에 있던 아이 셔츠로 눈을 털어내고 유리창의 얼어붙은 눈은 아이의 그림책으로 긁어냈다. 며칠 동안 얼어있던 눈은 쉽게 제거되지도 않고 손은 찢어질 것처럼 시렸다. 게다가 병실에 혼자 있는 아이가 걱정이 되어 마음은 더 급해졌다.


 

  옛날에 우리 아빠도 눈이 내린 날에는 온갖 도구를 사용해 눈을 치우셨다. 빗자루는 물론이고 쓰레받기며 노래테이프 케이스 같은 것도 유용한 도구였다. 산 아래에서는 눈이 내리지 않아도 아침에는 차 유리에 성에가 뿌옇게 얼고는 했다. 우리 집은 학교나 버스 정류장까지는 아이 걸음으로 걸어서 한 시간, 차로는 5분 정도 걸렸다. 매일 아침 차로 우리 오 남매를 나르는 것은 아빠의 평생의 과제였다.  


  이제는 나도 어른이 되어 차 위에서 맨 손으로 눈을 털고 있으니 아빠가 생각난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아빠는 단 한 번도 우리들에게 차의 눈을 털어달라고 하신 적이 없다. 급한 마음에 도와준다고 나서도 못 하게 하셨다. 눈을 치우는 내 빨간 손 위에, 아빠의 손이 겹쳐 보인다. 아빠의 손은 평생 연장을 들고 살아서 언제나 투박하게 곱아있고 거칠게 부르터 있었다. 아빠의 손은 더 크고 강해서 시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유리창은 어찌 눈을 처리했지만 차 위에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혼자 애 쓰는 걸 보다 못한 병원 직원이 빗자루를 빌려주셨다. 간신히 눈을 털어내고 부랴부랴 병실로 돌아갔다.

짐을 싣고 아이를 차에 태웠는데 이제는 얼어붙은 골목길이 문제였다. 차가 다니는 큰길은 문제가 없지만 햇빛이 들지 않는 뒷골목은 빙판길 그 자체였다.


 섣불리 운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이와 다시 차에서 내려 병원 건물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에게 만화를 틀어주고, 나는 눈길 운전에 대해 검색했다. 퇴원은 했지만 아이는 완전히 회복하지 않은데다 카페 안은 또 얼마나 춥던지.


 ‘대리운전을 부를까?’,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가 차는 나중에 찾으러 올까?’

고작 5분이면 갈 거리에 돈을 쓰고 사람을 부르기에는 속이 쓰렸다. 눈길에 나가서 운전하는 게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참 시간을 때우다 결국 마음을 다잡고 차에 올랐다. 아이가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천천히 차를 몰아 골목길로 나섰다. 생각보다 운전 할만 했다.무사히 차도로 나오자 안도감에 한숨부터 나왔다. 너무 지레 겁을 먹었다는 생각에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카페에서 한 시간 동안 눈길 운전에 대해 검색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나를 운전하게 만든 건 요령이 아니라 용기였다. 아픈 아이를 빨리 따뜻한 집에 데려가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요즘은 추운 계절에도 따뜻하게 운전할 수 있다. 의자는 물론이거니와 핸들도 따뜻해진다. 뜨근뜨근한 핸들을 잡다 보면 아빠 생각이 나고는 한다. 겨울에는 아침마다 맨손으로 눈을 치우고, 차가운 핸들을 잡고 운전하던 아버지 손. 그 시절에 이런 열선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외진 산골에서 아이 다섯을 키우며 억척스럽게 삶을 일군 것은 아빠와 엄마의 책임감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부모의 책임감으로 자라는 가 보다.


그나저나, 나는 눈 오는 날이 싫다. 또 눈이 내리고 있다. (2024.01.23)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입원시키고 퇴원시키는 데에 도가 텄는데도 이 날은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돈이 없어서 아이가 아픈데 병원을 못 가는 것 보다 백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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