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페루 완차코
오후 12시,
점심때가 돼서야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선다.
태양이 머리 바로 위에 떠있는 오후의 완차코는
작은 거리마다 쨍한 햇살이 그늘막 하나 없이 놓여있었고,
작지만 사랑스러운 페루의 해변도시임을 알리려는 듯 알싸한 비린내가 코끝을 찌른다.
뜨거운 공기를 타고 퍼져가는 바다내음을 맡으며
걸을 때마다 헷갈리는 골목골목을 지나 빨래방으로 향했다.
전날 맡겨둔 묵직한 빨랫봉지를 한아름 들고 나온다.
며칠째 비싼 빨랫값에 전전긍긍하며 꾸역꾸역 모아두었던 빨래가
다시금 보송보송한 모습으로 미지근한 온기와 함께 담겨있었다.
끙끙 머리를 싸매고 앓던 문제가 속시원히 해결된 기분과 함께
왠지 모를 뿌듯함에 홀가분함까지 더해지니
완차코를 거니는 걸음까지도 그저 가벼울 따름이다.
쾌쾌한 냄새와 축축한 땀이 한가득 베어든 묵직함으로 나를 고생시키던 빨래가
향긋한 섬유유연제의 냄새를 풍기며
햇살에 말려 머금은 아련한 따스함을 품은 채 안겨있으니
여행을 위한 또 다른 에너지가 하나 더 채워진 것만 같다.
이제 또다시 여행을 시작해볼까.
커다란 빨랫봉지 하나 덩그러니 들고 걷는 완차코의 거리에는
눈에 들어올 만한 이국적인 향기가 짙은 풍경들이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특별히 아름답다고 감탄할 만한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아무렇게나 통일성 없이 칠해진 건물들,
휑한 거리가 무색하도록 무심히 열어젖힌 가게 문,
그늘이 놓일 새도 없이 뜨거운 햇볕에 달구어진 골목이 전부였다.
이곳에 도착한 첫날
여행자의 촉을 세우는 낯선 어색함이 감도는 동네를 거닐며
과연 이곳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날 수 있을까,라고 품었던 의심은
며칠이 지나 이곳에 머문 지 어느덧 일주일이 넘어가면서
처음과 전혀 다른 감정, 그리고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들과 차차 마주하기 시작했다.
특별하게 정돈되고 뚜렷한 볼거리가 가득한 곳은 아니지만
매일 아침 일어나 걷고, 돌아서다 잠시 쉬었다가 가기도 하는 이 도시에선
그동안 보았던 그 어떤 여행지보다 달콤하고 포근한 정겨움이
피할 수 없을 만큼 적나라하게 놓여있었다.
특히나 아침이건 저녁이건 늦은 밤이건
언제나 발걸음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물던 완차코의 해변에는
나만큼이나 완차코의 소박한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가득했다.
낚시를 하러 나가는 어부들도,
까르르 웃으며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도,
물속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캐는 해녀 어머님들도,
이른 아침부터 커다란 보드를 들고 바다로 향하는 서퍼들도,
모두가 사랑스러운 일상의 순간을 그려놓고 있었다.
야자수가 듬성듬성 놓인 골목에 어스름한 땅거미가 지면
가게마다 입을 맞춘 듯 흥겨운 리듬을 실어놓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새까만 완차코의 밤을 깨우는 황금빛 가로등에 기대어 걷노라면
그 사이 달콤한 음식 냄새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걸음을 붙잡곤 한다.
눈에 띄는 현란한 간판이나 상위권에 자리한 맛집들을 찾아다닐 필요도 없다.
오늘따라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이곳에서 가장 완차코다운 하루를 즐기는 법일 테니 말이다.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어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지 않는,
억지로 꾸미지 않고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들의 얼굴과 하루가
우연히 그곳에 들른 누군가의 마음을 한없이 깊게 파고들 뿐이다.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완차코가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 정도면 충분해, 지금 이대로도 아주 좋아!
오늘도 어김없이 매일 향하던 도나펠리라는 작은 식당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 식당도 운이 좋게 묵고 있는 집의 호스트가 추천해준 덕에 알게 된 가게였다.
어떤 여행 어플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정보 하나 찾을 수 없던 식당.
고로 이곳은 완차코를 살아가는 현지인들이 오가는 식당이며
완차코를 진정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찾게 되는 식당이기도 했다.
매일 점심시간이면 그 어떤 다른 선택지도 생각지 않고 늘 이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앉는다.
일종의 나를 알리는 수단일 수도 있지만,
나에겐 이 가게가 단순히 수없이 많은 여행을 하며 끼니를 때우고 스쳐 지나가는 공간이 아닌
조금은 특별하고 의미 있는 장소로 남길 바라는 욕심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갈 때마다 늘 비어있는 그 자리가
이젠 나를 위해 비워두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토록 작은 가게 하나에 애정을 쏟아붓게 된 것은
단지 소박한 가게의 전경과 늘 놓여있는 내 전용좌석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식당은 음식이 맛있어야 손님이 끊이지 않는 법이다.
한 끼에 3천 원도 하지 않는 착한 가격에
기대 없이 마주했던 음식에 제대로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먼저, 굶주린 속을 달래는 따뜻하고 푸짐한 수프 한 그릇을 비워내면
어느새 주문한 메인 음식이 또다시 테이블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그릇에 한가득 담겨 나온다.
진한 국물로 속을 데운 후 고슬고슬한 밥 위에
갖가지 식욕을 자극하는 반찬을 올려 먹다 보면
이곳이 페루인지 완차코라는 이름 모를 동네인지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이 음식을 먹고 있는 순간만으로도 행복한 미소가 떠나가질 않으므로,
이곳에서 늘 그렇듯 욕심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지나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하므로 말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천천히 완차코에 빠져들고 있노라면
옹기종기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와
천천히 흐르는 일상의 한 단면이 포근하게 겹쳐온다.
딱히 여행자라서 더 많은 돈을 받는다거나,
특별히 새로운 메뉴를 건넨다거나 할 것 없이
실은 누가 여행자이고 현지인인지 조차 구분되지 않는 이곳에선
굳이 여행자라는 신분을 억지로 숨기려 할 필요도, 굳이 드러내려 할 필요도 없다.
그들처럼, 그들과 함께
먹고, 웃고, 쉬다, 걸으며 완차코의 하루를 보낼 뿐이다.
어느새 이 작고 조그만 마을에
나는 구석구석 나의 이야기들을 채워 넣었다.
어느새 내 이야기가 이 도시에 스며들고 있었다.
이토록 작고 아담한 완차코를 사랑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오랜 시간 머물며 작은 골목이며 이름 모를 가게마다
차곡차곡 채워지는, 오로지 나의 이야기로만 채워지는 순간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실을 무엇보다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해 준 그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커다란 골목을 하나 돌면 머리가 새하얀 백발의 할머니께서
푸짐한 아침 한상을 차려주시는 가게가 있어요.
인상도 좋으시니 커피 한잔 정도는 더 마셔도 뭐라 하지 않으시죠.
그 가게 옆엔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친절하게 와플을 구워주시는 아저씨가 계시고요.
반대편 골목으로 나오면 그럴싸한 냄새가 풍기는 피자가게가 있지만
실은 냄새에 속아버리기 일쑤죠.
대신 그 피자가게 맞은편에 간판 하나 없지만
커다란 초록색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조촐하게 놓인 포켓볼 대가 하나 보여요.
구멍은 잘 맞지 않지만 가끔 따분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엔 제격이죠.
우연히라도 완차코사람들과 게임 한판을 즐긴다면 맥주 한잔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다음 골목으로 넘어가면 사실 음식은 그저 그렇지만 입담이 좋은 지미 아저씨네 가게가 나와요.
긴 머리를 질끈 묶으신 아저씨는 커다란 목소리로 지나가는 길을 붙잡고도 인사를 건네시곤 해요.
가끔은 멀리서 달려오시기도 하고요.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젊음을 사랑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은 그 정겨움에 음식을 포기하고서라도 들르게 돼요.
순전히 아저씨와 주고받는 싱거운 농담이 그리워서 말이죠.
어둑어둑해진 밤 사이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놓인 조그만 칵테일 바는
기가 막히는 피스코 샤워가 한잔 값에 두 잔이나 나오니 이만한 인심이 또 없죠.
해변 앞에 놓인 노란 등대가 아름다운 레스토랑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사이드 메뉴와 지글지글 바비큐가 환상이에요.
게다가 운이 좋으면 엄청난 실력의 라이브 연주까지 더해지니 그날 밤은 일찍 들어갈 수 없겠죠.
어색했던 첫 얼굴이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매일 아침 일어나 해가 지면 집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
모든 순간이, 그 장소가, 그 사람들이 더없이 익숙해져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일일이 다 그려낼 수는 없지만
그곳을 말하는 단 한 문장만으로도 이미 내 머릿속에는, 그리고 내 가슴속에는
그날의 내가, 그 날의 행복했던 표정이 고스란히 떠올라 다시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기어기 그날의 이야기들이 잊을 수 없는 뜨거운 한 순간이 되어버렸다.
이제 어느 길을 걷더라도,
어느 곳에 들어가더라도,
어디서 밥을 먹더라도,
어디에서 잠시 앉아 쉬고 있더라도
누군가를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결국 나는 한동안 완차코라는 도시에서 도통 헤어 나오질 못했다.
아니,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완차코라는 이름은
뭔지 모를 떨림과 아쉬움, 고마움과 그리움이 한데 섞인 터질듯한 감정이
내 심장을 강하게 누르 듯 내 안을 차오르게 만들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겐 여행을 떠나오길 잘했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어 준
또 하나의 고마운 도시였으니 말이다.
단순히 들렀다 돌아가는 이름도 모르는 낯선 관광객이 아닌
떠나는 날이면 심심찮게 아쉬움을 건네줄 수 있는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나라는 사람이 잠시나마 기억될 수 있는
여행자로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내 심장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기어코 완차코라는 세글자는
그 이름만으로 내 심장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어딘가에 들러 편하게 배고픔을 달래고 기꺼이 술 한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소소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언제고 꼭 한번 다시 그들을 만나기 위해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내가 가장 사랑해마지않는 동네가 있어
오늘 밤도 이곳은 잊히려야 잊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