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페루 완차코 서핑
페루에서 서핑을 한다고?!
참으로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라 할 수 있겠다.
나에겐 그다지 익숙하진 않던 실은 고작 한 번 해본 게 전부였던
그렇지만 언젠간 꼭 한번 남들처럼 멋지게 커다란 파도를 잡아타고는
푸른 해변을 쭉 뻗어 달려오는 그런 날이 다가오기를 내심 바랬던 서핑을
드디어 처음, 이 세계여행에서 도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도 페루에서 말이다.
페루 그리고 서핑...?
생각해보면 꽤나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기분이 드는 게 먼저일지 모른다.
나부터도 서핑을 왜 페루에서 해야 하나?, 라는 의문을 제일 먼저 던졌으니 말이다.
예상에 없던 일들이 생기고,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고, 전혀 생각지도 않던 곳으로 향하게 되면서
어쩌면 우리는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여행을 차곡차곡 채워가는지 모른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여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페루까지 여행을 이어오면서 나는 수많은 계획의 변형과 수정을 거듭했고,
오늘쯤에 나는 기어코 페루 완차코라는 이 작고 조그만 도시에 와있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이 여정을 여행이 이끈 운명이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처음 서핑을 하게 된 것은 1년 전 가족들과 함께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였다.
동생과 함께 색다른 제주도를 느껴보고 싶어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던 중,
마침 여름이라는 계절과 수상스포츠를 사랑하는 취향까지 딱 맞아떨어지는
서핑에 도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처음 만난 서핑은 아주 낯설고 거칠었다.
체온 유지를 위해 입는 웻수트(wet-suit)마저도 앞 뒤가 어디인지 구분이 되질 않아
힘들게 입었던 옷을 다시 뒤집어 입어야 했으니 말이다.
조그만 트럭에 온갖 장비를 싣고 사람들을 태우고 근처 앞바다인 중문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간단한 준비운동과 자세를 배우고 물에 들어가기 전 모래사장에 엎드려 충분히 연습을 했건만
역시나 몸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게다가 서핑보드는 또 보는 것과 다르게 왜 그렇게 크고 무거운지.
2시간 정도를 타고, 일어나고, 넘어지고, 물을 먹고, 다시 도전하기를 반복하며
서핑이란 새로운 스포츠에 대한 열망이 커져갈 때쯤,
비록 그럴듯한 성적은 거두지 못했지만 언젠간 다시 도전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하며
내 몸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서핑보드를 이끌고 모래사장을 걸어 나왔다.
어쩌면 첫 서핑의 기억은 물속에서의 고군분투보다
마지막 커다란 보드를 이끌고 걸어 나오는 순간의 고난이 더욱 커다랗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 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옆구리와 팔뚝이 아리는 것만 같으니 말이다.
어느덧 세계여행을 시작하고 버킷리스트에 적어둔
'여행 가서 서핑하기' 항목을 막연하게 매일 머릿속에 그리며
언제쯤, 어디에서 이 도전을 성공할 수 있을까, 라는 설렘을 앉은 채 여행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여행의 반이 지나 남미로 넘어오면서
생각보다 낯설게 느껴지던 서핑과 꽤나 자주 만나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듯한 작은 도시에도
커다란 해변과 반짝이는 햇살쯤은 늘 눈 앞을 채웠고
그 앞에 알록달록한 보드를 들고 유유히 걸어가는 서퍼들 또한
그림 같은 풍경에 빠지지 않는 아름다운 피사체였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도 곧 저들과 함께 이 바닷속에 뛰어들 수 있겠지, 라며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그리고 드디어 볼리비아 여행이 막을 내리고 페루로 넘어가기 전,
우연히도 서핑을 하며 남미 여행을 이어가는 여행자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들은 남미에서 서핑을 하려거든 페루로 가라며 적극 추천을 해주었다.
페루는 세계적인 서핑대회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며,
수도인 리마부터 트루히요라는 도시 옆에 붙은 작은 마을인 완차코에서도
서핑을 즐기기에 좋은 파도들이 넘쳐나 늘 지나가는 서퍼들을 붙잡는 곳이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이곳에 반드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오랜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곳,
페루 완차코.
완차코에 도착과 동시에 나른한 휴양지의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
부서지는 파도에 따라오는 시원한 파도소리,
여유롭게 해변가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키만 한 서핑보드를 들고
유유히 해변을 걸어가는 서퍼들이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확히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처음 만난 그 모습 그대로 완차코는 끝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애정 하는 도시가 되어버렸다.
작은 골목에서부터 해변가 앞으로 이어진 넓은 길목에까지
서핑의 천국이라 불릴 만큼 수많은 서핑 샵들이 완차코의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름도 생소한 도시답게 아무리 열심히 인터넷을 찾아본다고 한들
곳곳의 서핑 샵들을 명확히 비교해놓은 고마운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크게 바란 것도 아니었기에 아쉬움을 접어두고 눈여겨봐 두었던 몇몇 가게로 향했다.
꽤 발품을 팔아 가장 번화한 해변가 앞에 자리한 커다란 서핑 샵으로 들어섰다.
서핑 강습과 장비 대여까지 포함해 70솔(대략 26,000원)을 지불하고는 당장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막상 시작하게 되니 미친 듯이 떨려오는 심장이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여실히 말해주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시간에 맞춰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동작을 배운 뒤 바로 앞에 펼쳐진 해변으로 향했다.
완차코에는 하나의 해변이 기다란 다리 덕분에 둘로 나뉘는데
해변을 바라보고 오른편 바다가 파도의 세기가 약하고 수심도 조금 낮은 편이다.
처음 시작인만큼 오른쪽 해변에서 강습을 시작하기로 했다.
처음도 아니건만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아니 어쩌면 처음이 아니었기에 떨리고 또 떨렸는지도 몰랐다.
이왕이면 멋지게 잘 해내었으면 하는 바람과 소망을 품으며 호기롭게 바다로 뛰어들었다.
2시간 동안 이루어진 강습에 나는 그 누구보다 전투적으로 매달렸다.
기필코 일어서고 말겠다고.
다가오는 저 파도를 잡아타고 말겠다고.
그 열망 덕분이었는지 일어서는 동작(take-off)에 있어서는 꽤나 성공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긴장감으로 똘똘 뭉쳤던 2시간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얼마나 맹렬히 파도와 싸웠는지 딱딱하게 뭉친 어깨와 힘없이 떨리는 두 다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열심히 노력한 덕에 현지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보란 듯이 파도를 잡아 탔지만
뭔지 모를 석연치 않은 아쉬움이 함께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렇게 페루에서의 첫 서핑 도전이 나름 무사히 마무리가 되었고
그다음 날은 강습 없이 보드만 빌려 다시 어제 향했던 바다로 향했다.
어제의 실력을 믿은 채 호기롭게 던져진 보드 위에서 나는 맥없이 넘어지고 흔들렸다.
이론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자세도 분명 배운 대로 정확했건만
파도는 전혀 잡힐 생각이 없었다.
간신히 작은 파도 몇 개를 잡아 타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뒤였다.
하루 사이에 이토록 극명히 갈리는 서핑의 매력 덕분에
나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서핑 샵을 알아보기 위해 다음날 일찍 집을 나섰다.
2% 채워지지 않는 뭔지 모를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길 바라며
나는 무작정 해변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좁은 골목길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몇 번의 골목길이 교차하고,
나는 운명적으로 내 인생에 '서핑'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를 고마운 시간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페페 아저씨?
간판도 하나 없이 하얀 시멘트가 마른 벽에
빨간색 스프레이로 적힌 '서핑 강습'이라는 글자 하나.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친 페페 아저씨와의 첫 만남은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이전에 만났던 서핑 강사들은 대부분 젊은 청년들에 탄탄한 몸을 드러내고 있었건만
페페 아저씨는 친근한 동네 아저씨와 같은 모습으로 넉넉한 배만큼이나 푸근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그래서 더욱 좋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왠지 좋은 그런 기분,
아주 오랜만에 그 기분 좋은 느낌이 스르륵 나를 에워싼다.
서핑 강습을 받고 싶어 찾아왔다고 말하자
아저씨는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제안을 해주셨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누가 가르쳐주시는지 묻자
아저씨는 동그란 눈을 반달로 접으시며 본인을 가리키셨다.
이로써 우리의 두 번째 서핑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페페 아저씨의 가게 앞에 도착했다.
아저씨와 함께하는 서핑이 처음이었던 만큼
나와 맞는 장비를 체크하려면 넉넉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웻수트를 갈아입고 내 발과 맞는 사이즈의 웻슈즈(wet-shoes)를 골라 신고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내 수준에 맞는 보드를 고르기 위해 수많은 보드가 놓여있는 곳 앞에 섰다.
다양한 보드를 보며 한참 동안 고민에 잠겨있던 나는 아저씨를 보며 물었다.
"아저씨, 어떤 보드를 타야 넘어지지 않고 잘 탈 수 있을까요?"
그러자 아저씨는 투명하게 들어오는 햇살을 뒤에 두고 말씀하셨다.
"음... 어떤 보드를 타느냐보단 내가 잘 탈 수 있는 보드를 고르는 게 먼저야.
그러고 나서 바다와 파도, 그리고 그 순간을 누비는 서핑을 그저 즐기기만 해.
그게 바로 서핑이야."
아저씨는 말했다.
페페 아저씨와 거대한 파도 속으로 들어가는 서핑은 너무도 즐거웠다.
성공적이라는 말보단 즐겁다는 말이 먼저 입 밖에서 튀어나왔다.
"오늘 정말 성공적이었어!" 가 아닌, "오늘 정말 재밌었어!"라고 말이다.
더 이상 서핑은 나에게 풀어야 할 문제도,
넘어내야만 하는 문턱도, 끝내 마쳐야 할 숙제도 아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여행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자,
소중한 사람들과 잊지 못할 순간을 간직하게 해 줄 순간이며,
뭐든지 성공과 실패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거센 파도에 넘어지고 끝없이 밀려나도 즐거웠다.
어깨가 뻐근해지고 두 팔이 빠질 듯 패들링을 이어가도 그저 즐거웠다.
힘들게 잡아 탄 파도를 중간에 놓쳐버리고,
하물며 일어나는 것조차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져버려도 즐거웠다.
내가 어떤 결과를 가져와도
페페 아저씨는 언제나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환호를 해주었고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에도 아저씨는 다시 돌아온 나에게
잘했다며 환한 미소와 칭찬을 아낌없이 건네주셨다.
나는 그제야 정말로 서핑을 즐기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서핑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넘어지지 않고 일어나야만 한다는 생각도,
파도를 타고 나아가야만 한다는 생각도,
더 이상 서핑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그려지는 순간이 되지 못했다.
오로지 그 순간은
일어나지 못했을 때, 파도와 함께 바닷속으로 빠져버렸을 때도
늘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던 페페 아저씨의 따스한 얼굴이었다.
혹여나 일어나지 못해 실망할까 봐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다시 물속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서는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셨던 페페 아저씨.
우린 지금 달리기 위해, 파도와 싸우기 위해 온 게 아니니까.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함께 이 파도와 바다를 즐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껏 행복해하기엔 충분하니까,라고 말하는 아저씨가 보였다.
무엇을 하더라도 잘 해내야만 한다는 무거운 욕심,
성공해야만 한다는,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서운 압박감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쉽사리 가려버리고 만다.
내가 왜 그것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처음 시작하던 때의 내 마음은 어땠는지.
우리는 점점 결과에 욕심을 내고 성공과 실패에 집착을 하게 되면서
결과를 떼어놓은 온전한 모습만으로는 더 이상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행복해하던 처음의 얼굴이, 처음의 감정이 자꾸만 사라지고 있다.
가끔은 순전히 내가 하는 모든 것들 그 자체만으로 다가오는 행복에 눈을 떠보기를,
앞으로 다가올 결과로 이 모든 행동의 가치를 점수 매기지 않기를.
그 어떤 결과로도 다시 찾은 그 행복을 가늠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일어나고 넘어지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욕심을 걷어버리고 나니,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완차코의 파도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만이
무엇보다 커다란 행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에게 서핑은
완차코, 그리고 페페 아저씨를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