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
눈앞에 놓인 이것을 도대체 무슨 색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지구 상에 이토록 하얗고 푸르른 투명한 빛이 존재했었던 걸까.
그동안 내가 알고 보았던 색들이 모두 허무해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무런 색도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은 가늠할 수조차 없는 깊고 오랜 세월이 켜켜이 쌓인
거대한 자연이라는 존재로 눈앞에 나타난 빙하였으니 말이다.
남극과 가까운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대륙에 위치한 엘 칼라파테에 도착했다.
세상의 끝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아르헨티나의 최남단과 아주 가까운 곳이다.
이곳에선 익숙한 것들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높고 커다란 건물들, 매캐한 매연이 섞인 시끄러운 소음과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더욱 쉽게 내 두 눈을 가득 메운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무수한 지평선, 그 아래로 펼쳐진 드넓은 평야,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탁 트인 하늘과 맑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상쾌한 공기까지.
익숙하지 않지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것들은 어쩌면 이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엘 칼라파테에 와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장엄한 자연이 끝없이 나를 품어주는 것만 같은
짙은 감동이 물밀듯 밀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듬성듬성 세워진 낮은 건물들과 차들도 몇 대 지나다니지 않는 넓은 대로를 지나자
아무렇지 않게 펼쳐져 있는 커다란 설산이 눈 앞의 거대한 화폭에 한 자락을 그려 넣는다.
엘 칼라파테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모레노 빙하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모레노 빙하를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빙하 위를 걸으며 온몸으로 빙하의 아찔한 위엄을 느껴볼 수 있는 빙하 트레킹을 해보기로 했다.
2시간 정도 달려 국립공원 입구를 지나 산책로 앞에 다다랐다.
빙하 트레킹을 하기 전까지 2시간가량 남는 시간 동안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빙하를 감상해본다.
저 먼 곳에서부터 빙하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눈부신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장장 70m에 달하는 우뚝 솟은 커다란 빙하들이 두 눈을 빼곡하게 채운다.
푸른 기둥과 새하얀 기둥이 교차하는 빙하의 빛깔은
보고 있는 이 순간마저도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눈을 깜박이게 만들었다.
때론 보석처럼 투명하게 반짝이기도 하고
때론 하늘처럼, 강물처럼 한없이 푸르기도 했다.
그 어떤 색으로 빙하의 아름다운 결정체를 이루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토록 황홀한 자연의 감흥을 어떻게 단순한 색 한 가지로 전부 표현할 수 있을까.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커다란 빙하가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에 멈춰 섰다.
하얗다 못해 새파란 얼음의 결정체들이 모인 빙하를 눈에 담는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만을 남긴 채 고요히 빙하의 움직임을 느껴본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작스레 커다란 굉음이 온 하늘을 뒤흔들 듯 울려 퍼졌다.
마치 천둥이 머리 바로 위에서 치는 듯한 굉음이 지나가자
눈앞에 있던 빙하의 커다란 조각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따라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돌린다.
심장을 뒤흔드는 빙하의 붕락과 함께 울려 퍼지는 굉음을 듣고 있으니 쉽사리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황홀함과 경이로움, 신비로움과 두려움이 한데 섞여 멍하니 떨어져 나간 빙하를 응시했다.
감히 이곳에선 어떤 번잡한 생각도 고뇌도 쉽사리 고개를 내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토록 커다란 붕락은 쉽게 볼 수 없는 순간임을 알기에
눈앞에서 벌어진 놀라운 자연의 흐름 앞에 나는 그렇게 말을 잃었다.
그 후에도 수차례 붕락을 일으키는 굉음은 계속되었고
자그마한 빙하의 조각들이 수없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바라보는 빙하의 붕락에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과 함께 이내 안타까움이 피어올랐다.
끝없이 떨어져 나가는 빙하들을 보고 있으니
오래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결국엔 다 사라져 버릴까 싶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더 오래 지켜주지 못한 것만 같아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시린 마음을 안고 고개를 떨구었다.
커다란 빙하 뒤로 펼쳐진 높다란 설산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걷는 내내 보고 또 보는 풍경이지만
계속해서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감탄은 멈출 줄을 모른다.
아주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펼쳐지는 그림 같은 풍경 앞에 이미 온 마음을 빼앗겨 버린 지 오래였다.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새소리와 물소리마저
걸어가는 발걸음을 맞춰주는 나지막한 연주가 되어주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엔 새하얀 구름이 가득하다.
오늘따라 구름이 아주 가까이, 그렇게 꼭 내 머리 위에 앉아있는 것만 같다.
2시간의 아름답던 산책길이 끝나고 다시 배를 타고 빙하 트레킹을 위해 강을 건넌다.
모레노 빙하 트레킹을 시작하는 입구에 도착해 짐을 재정비하고
가이드와 함께 빙하의 크기와 움직임 등 간단한 설명과 안전사항에 대해 숙지를 하고 나면
드디어 빙하 트레킹이 시작된다.
함께 빙하 트레킹을 하게 될 사람들과 줄을 지어 언덕 중턱까지 오르면
본격적으로 빙판길을 걷기 위해 모두가 아이젠을 착용해야 한다.
어색하고 낯선 순간이 다가오니 갑작스레 심장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젠을 채운 무거운 발을 하나둘 떼 본다.
생전 처음 껴본 아이젠에 걸음걸이 하나도 쉽지 않지만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발걸음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내디뎌 본다.
불안한 듯 아슬아슬 시작되는 처음이란 감정은
늘 그렇듯 살아있는 심장에 주체할 수 없는 두근거림을 불어넣는다.
한껏 상기된 얼굴과 걷잡을 수 없이 뛰어대는 심장과 함께 드디어 빙하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투명한 얼음의 결정체들이 쌓인 빙하 속을 걷는다.
빙하는 멀리서 본 것과 동일하게, 아니 더욱 거대하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빙하를 두 발로 걷고 있다는 사실에 턱 끝까지 차오르는 설렘을 안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나는 자꾸만 감격스러워 그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토록 눈부신 빙하에 작은 내 발걸음 하나가 아주 선명히 새겨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말은 곧 나는 지금 엘 칼라파테에 와있다는 사실이기도 했고,
어쩌면 오늘 하루는 내 인생에 다시없을 가장 뜨거운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이 눈부신 광경을 사진으로 담아보고 싶어 연신 카메라를 눌러보지만
감히 이 작은 프레임 안에 이토록 광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겠다는 건 욕심일지도 몰랐다.
두 눈으로 담기에도 벅찬 빙하의 모습들을
두 발로 걸으며 온 몸에 차곡차곡 채워 넣을 뿐이다.
중간중간 길을 걷다 보이는 푸른얼음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깊은 곳까지 이어지는 푸른 빛깔의 물줄기를 따라가니
마치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영원한 푸른빛으로 물들어버릴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버리곤 했다.
또다시 높은 오르막을 오르고
다시 또 가파른 내리막을 걷는다.
여전히 한발 한발 힘을 실어 내딛는 발걸음에 다리는 점점 더 무거워지지만
투명하게 반짝이는 빙하를 보고 만지고 걸어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엔
뜨겁게 채워지는 감격의 순간들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나를 채우지 못했다.
빙하의 눈부심에 넋을 놓고 걷던 2시간의 코스가 점점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끝날 수는 없었는지 약간의 아쉬움을 달래줄 우리만의 작은 축배를 들기로 한다.
앞서 가던 가이드가 모두를 향해 외친다.
“우리의 마지막 걸음을 축하하기 위해 지금부터 아이스 바가 열립니다! 다 함께 위스키~”
성공적으로 끝난 빙하 트레킹을 자축하기 위해 빙하 한가운데서 시작된 아이스 바.
먼저 추위를 날려줄 위스키 한 병과 잔을 놓고,
깨끗한 빙하의 얼음조각을 양동이 한 가득 담아내면 축배를 들 준비가 끝이 난다.
우리가 걸어온 빙하의 조각들이 듬뿍 담긴 잔에 위스키를 콸콸 부어 넣고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외친다.
“치얼스!!”
이토록 짜릿한 낭만이 또 있을까.
짧은 축하파티를 마치고 마지막을 향해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몇 발자국 남지 않은 빙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오래 간직하고 싶어 천천히 속도를 늦춰본다.
끝으로 무거운 아이젠을 벗어버리자 그제야 눈부신 빙하 속 이야기가 끝이 났음을 실감했다.
돌아서서 처음과 똑같이 웅장하게 서있는 빙하를 보고 있으니
정말 내가 이곳을 걸어온 게 맞는지 새삼 믿기지가 않았다.
어쩌면 꿈에서조차 만날 수 없었을 황홀했던 시간들을 뒤로한 채 빙하를 떠난다.
빙하는 계속해서 움직일 것이고
또다시 녹고 얼기를 반복하며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김없이 나와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며
그때의 나는 지금처럼 겸손하게 두 손을 맞잡고
새하얀 빙하 속에서 하염없이 순수한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또다시 걸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끔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면,
아무런 용기도 나지 않아 두 다리가 무색하게 흔들리고 있다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순간들이 앞을 가로막았다면,
나는 다시 이곳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더없이 차디 찬, 더없이 뜨겁게 타오르는 빙하 속을 가만히 거닐 것이다.
그날에 그곳에서 나는 또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워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나는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자연이 내게 들려주는 대답은
힘겹게 내디딘 한 걸음걸음을 단단히 붙들어 놓을 테니
나는 그 대답을 쥐고 묵묵히 다음 걸음을 내디뎌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