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nita Mar 31. 2017

여행을 꿈꾸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지극히 평범한 그 시간이 간절한 날


그동안 바쁘게 움직이던 하루가 오늘은 조금 잠잠해졌다.

좁다란 버스 안에 몸을 구겨 넣고 
8시간 동안 꼬불거리는 산 중턱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달려온 덕분에 
하얀 색감의 깨끗하고 맑은 아름다움이 곳곳에 배어 있는 볼리비아 수크레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힘겨움이 덕지덕지 붙은 기나긴 밤은 고요한 숨소리만 남긴 채 순식간에 흘러갔고
밤새 쏟아붓던 비가 서서히 마르고 둥그런 해가 솟아오르자
하늘은 새하얀 구름을 담아 더없이 푸르게 머리 위를 채운다.   


느릿느릿 일어나 찌뿌듯한 몸을 한없이 침대에 비비다가
허기가 몰려올 때쯤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다.
    

기온은 낮지만 햇살은 따사로웠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평화로웠다.


    
집을 지나 작은 골목을 몇 개를 돌면 
매일 아침을 가장 먼저 시작하는 커다란 수크레 중앙시장이 나온다.
오늘 아침은 그곳에서 해결할 생각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곳에선 번지르르한 슈퍼마켓도, 정돈된 가게들도 의미가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른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분주함이 오고 가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소박한 정과 
보는 사람까지 미소 짓게 만드는 따스하고 정겨운 소리들만이 

더욱 생생하게 피어오른다.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이야기들을 엮어 나를 수 있는 건 
물건이 아닌 그 도시의 냄새와 사람, 

그리고 마음을 사 올 수 있는 시장만이 그 역할을 해낼 뿐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알록달록 색색깔의 빛깔을 품은 과일들이 
차곡차곡 줄지어 빼곡한 상자 안에 가득 담겨있었다.
     
어떤 모양의 어떤 색감의 과일이든 제각각의 달콤한 향들이
옮기는 걸음마다 스르륵 내려앉는다.
군침 도는 과일들의 빛깔과 향에 걸어가는 걸음마저도 지겨울 틈이 없다.
    
오늘은 어떤 과일들이 싱싱한지,
어떤 가게 아주머니가 인심이 좋아 보이는지,
집에 가는 길엔 어떤 과일을 사 가면 좋을지,
시장 안쪽까지 즐비한 과일 골목을 걸어가며 이리저리 기분 좋은 고민을 해본다.   



몇 개의 과일을 찜해두고는 위층으로 올라가자 다양한 식재료들이 두 눈을 가득 메웠다.
익숙한 고춧가루부터 각종 견과류와 처음 보는 낯선 조미료들까지.
익숙하면서도 매번 다른 시장의 풍경을 만나는 재미에 
언제고 새로운 도시에선 가장 먼저 시장을 찾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듯 전혀 다른 그곳의 이야기가 가장 잘 묻어있는 곳이니 말이다.

    
시장을 속속들이 둘러보고는 배고픔에 못 이겨 
서둘러 아침을 먹기 위해 3층으로 올라간다.
이미 계단에서부터 보글보글 끓는 소리들과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자 참고 있던 배고픔이 더욱 아우성을 친다.
    
닭요리가 맛있는 볼리비아답게
한국에서 익숙하게 보던 닭볶음탕, 백숙, 감자탕과 비슷한 모습의 음식들이
솥 한가득 맛있는 소리를 풍기며 끓고 있었다.


식당가 한 바퀴를 둘러보다 
푸근한 인심과 정겨운 웃음이 마치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지는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왠지 모르게 오늘은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네 백숙을 떠올리게 하는 뜨끈하고 맑은 국물의 Caldo de pollo 한 그릇과 
칼칼하고 진한 소스가 일품인 Aasado de olla를 주문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릇이 넘칠 듯 채워진 푸짐한 아침 한상이 차려진다.
다른 밑반찬은 딱히 없지만 쫄깃한 닭고기와 뜨끈한 국물 한 숟가락에
더 이상의 다른 반찬은 무의미해질 뿐이다.


허기진 배를 달래준 푸짐한 한 끼 식사가 단돈 2천원도 하지 않는 이곳은
어쩌면 지치고 힘든 배낭여행객들에겐 천국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잠기며
꽤나 많은 양의 아침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내일 또 오겠다는 기분 좋은 인사를 나누고는 

다시금 아래로 내려와 들어오는 길에 봐 두었던 과일가게로 향한다.
 

   
한눈에 봐도 노랗게 아주 잘 읽은 작은 바나나 한 다발을 사들고 또 다른 가게로 옮겼다.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시는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수박 한통과 망고 2개, 그리고 꼭 맛보라며 쥐어주신 멜론 한통을 집어 들었다.   


인심 좋게 자두 3개를 더 넣어주시더니
기어코 가는 발걸음을 붙잡고는 

모과 한 개를 무심하게 툭 반으로 갈라 먹어보라며 건네신다.

마치 시럽에 절인 듯 달달한 모과가 부드럽게 녹아들며 
입 안 가득 은은한 향이 베어 들자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번졌다.
    
만원도 채 하지 않는 수북한 과일들을 양손 가득 봉지에 담아 넣고는
푸근한 마음까지 안아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마다 따스한 햇살이 살며시 놓여있었고,
여전히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을 거닐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리고 우리가 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이토록 아주 사소한 순간 때문이 아닐까.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그곳을 떠올리며 먹먹한 감상에 젖을,
잔잔한 미소와 뭉클함이 가슴속에서 피어오를,
다시금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게 만들, 
그 순간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보자마자 입이 떡하니 벌어질만한 광활한 자연경관을 두 눈에 담고
다시는 맛볼 수 없을 낯선 재료들로 만든 음식을 먹는 것도 여행이겠지만,
결국 우린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아주 평범하고 익숙한 순간들에서 오는 설렘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여행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똑같이 자고 일어나는 순간에도,
밥을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시는 순간에도,
거리를 걷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순간에도,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일상에서와 별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한 순간마저도,

여행은 순식간에 사소한 설렘을 불어넣는다.


    

보잘것없던 내 하루의 모습이
낯선 곳에서 만큼은 이토록 새삼스레 설레기 시작한다.

 

그것이 일상에서 베이고 지쳐버린 몸을 
다시금 여행이란 똑같은 일상에 싣는 이유가 아닐까.


아주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순간에 맞닥트려서야
나는 비로소 여행을 떠나왔음을, 
낯선 곳에서의 하루를 시작하고 또다시 하루를 마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일상에선 너무 당연해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던 시간들마저
바깥의 풍경이 달라지고, 들려오는 소리가 달라지고,
낯선 거리의 냄새와 낯선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면,
당연했던 우리의 일상은 어느 순간 여행이 되어버린다.

    
결국 우린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는 일상이 
더 이상 우리에게 그 어떤 떨림도, 애착도 가져다주지 못할 때면
낯선 곳으로 장소를 바꾸고 정반대로 흐르는 시간을 거닐며

여행이란 이름 안에 또다시 같은 일상을 채워 넣는다.
그제야 답답했던 우리의 일상은 다시금 잊혔던 떨림을 되찾을 테니.


낯선 곳에서 똑같이 보내는 하루에는
이전의 내가 없고,
이전의 바보 같던 내 모습이 없다.
    
나를 꽁꽁 묶어두었던 지독한 고민도 없고,
불필요한 관계도, 긴장도 없다.
  

  
오로지 나와 나만이 존재할 뿐이다.
더 이상 누구의 부모도, 누구의 자녀도, 누구의 연인도,
어느 직장에 다니는 누구도, 
무슨 일을 하는 누구도 아니다.

그저 나는 이곳에서 나와 나일뿐이다.   

똑같은 하루를 보내지만
이곳에선 그 어떤 역할도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건
하루 세끼 피자를 먹는 것.
오래된 골목을 자주 거니는 것.
낮술과 낮잠을 즐기는 것.
지독한 완벽주의자이지만 허술한 구멍을 숨기지 않는 것.
무엇보다 사람을, 이야기를, 여행을 사랑하는 것.

오직 이것만이 여행에서의 나를 정의할 수 있다.         



여행은 반드시 떠나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하루가 얼마나 새로울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여행을 꿈꾸는 이유가 

아주 특별하고 화려한 순간들 때문이 아니라면,
잊어버리고 있던 나 자신과 마주하고 싶기 때문이라면,
무겁게 내려앉은 일상이 더 이상 나에게 그 어떤 설렘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라면, 
우리 살고 있는 그곳에서도 잠시나마 낯선 곳의 향기를 품어봄으로써
여행의 설렘과 짙은 감상을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변화하는 계절의 냄새,
낯과 밤이 다른 집 앞의 풍경,
매일 같이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는 거리의 모습,
새롭게 찾은 카페 하나와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에서도
우리는 여행이 두고 간 설렘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반드시 여행이 물리적으로 먼 거리여야만 할 필요는 없다.


집 앞 작은 카페에서 지친 하루를 풀어놓을 수 있다면,
내 방 한구석에서 가슴을 후벼 파는 책 한 구절에 밤을 지새울 수 있다면,
1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는 짧은 드라이브에 마음을 씻어낼 수 있다면,
잠시나마 묶여있던 일상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우린 그곳이 어디이건 충분히 먼 거리의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행이란, 
내가 무심히 지나쳐버린 

작고 사소한 순간들이 품고 있던 따뜻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물리적인 거리가 아닌 정신적으로 먼 거리에 놓인 
아주 낯설고 어색한 곳에 다다라서야 깨닫게 해주는 
무엇보다 지극히 평범한 순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