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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ita Apr 07. 2017

방황하는 여행자에게 집이라는 존재

#내집마련의 꿈이 이루어진 날


오랜만에 조금은 넓고 포근한 공기가 감도는 곳에 짐을 풀었다.

한동안 짧은 이동과 저렴한 호스텔을 전전하며
바깥 음식으로만 끼니를 해결하던 나를 위해 
오랜만에 조금 넉넉히 쉴 수 있는 곳에 머물기로 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집이었다.


큰 집이건 작은 집이건, 오래된 집이건, 새집이건
묵게 되는 집들은 늘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곳들은 언제나 같은 모양의 안정된 행복을 꺼내보였다.
이를테면 아늑함, 편안함, 느긋함, 익숙함, 나른함, 포근함과 같은 비슷한 모양의 느낌을 말이다.
 


다녀오면 나를 맞아줄 현관이 있고,
장을 봐오면 넉넉히 쌓아 둘 냉장고가 있고,
아침을 깨우는 따스한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가 있고,
따뜻한 커피 한잔에 사치스러운 여유가 일상이 되는 테라스가 있고,
가끔은 노래를 틀어놓고 큰소리로 따라 부르거나,
은은한 조명 밑에서 시시콜콜한 농담으로, 답이 없는 물음에 대한 짙은 고민으로
깊은 밤을 지새 울 거실이 있는 곳.
    

다시금 즐겨하던 습관을 꺼내놓을 수 있는 집이 생겼다.

다시금 일상을 꺼내놓을 수 있는 집이 생겼다.

이곳은 볼리비아의 산타크루즈이다.   



실은 수크레에서 볼리비아의 수도인 라파즈로 넘어가려던 참에
현지인들이 추천해주는 볼리비아의 도시를 여행하는 것도 좋겠다 싶어 
만나는 볼리비아 사람들마다 다음 여행지로 어디를 가면 좋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왕이면 지금 여기보다 더 아름답고, 볼리비아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들이 생각하는 볼리비아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파즈에 대해선 시큰둥해하는 모습이었다.
치안이나 심각한 교통체증, 정신없이 복잡한 미로처럼 꼬여있는 도시의 모습이 
아무래도 낯선 여행자에게 보일 만큼 자랑스럽지는 않은 듯해 보였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몇몇 사람들이 입을 모아 얘기 한 

산타크루즈라는 도시로 넘어가기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났다.
    
미지근한 바람이 세차게 감도는 산타크루즈에 도착하자 
이전의 볼리비아 도시들에서 봐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 펼쳐졌다.
볼리비아에서 떠올리기 쉽지 않은 높은 건물들이 곳곳에 솟아있었고, 
누가 봐도 볼리비아 내에서 가장 발전되고 잘 사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더없이 현대적이고 말끔히 단정되어있는 도시였다.    



수크레에 비해 오래되고 낡은 차들도 많지 않아 
매캐한 매연으로 눈시울을 찌푸릴 필요도 없었지만,
더불어 볼리비아만의 색을 보여줄 매력들도 사라져 버렸다.

보자기를 메고 화려한 색감의 전통의상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볼리비아 특유의 통통 튀는 박자와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녹아들어 있는 노랫소리도 좀처럼 들리질 않았다.
    
어쩌면 나에겐 훨씬 익숙한 도시의 모습이었지만
그렇기에 꽤나 아쉬운 도시의 얼굴이기도 했다.
낯선 여행자에게 이렇듯 번듯한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아쉽게도 볼리비아 특유의 분위기와 냄새를 느끼고 싶었던 나에겐
오히려 실망스러운 선택지에 불과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장을 보기 위해 오랜만에 보는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동안 머물렀던 작은 도시에선 상상도 할 수 없던 대형마트에 들어서니
오랜만에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는다.


역시 익숙한 것은 몸이 먼저 기억하나 보다.

게다가 손쉽게 살 수 있는 싱싱한 식재료들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오늘은 뭘 해 먹으면 좋을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오랜만에 조금 풍성한 식탁을 차려볼 양으로 마트 구석구석을 뛰어다닌다.
    
각종 채소를 곁들인 스테이크에 샴페인 한잔은 어떨까.
조금 생뚱맞아 보일지 모르지만 

볼리비아에선 웬만큼 위생적인 채소나 생고기를 사는 게 쉽지 않은 탓에
오랫동안 먹지 못했던 메뉴를 단번에 골라냈다. 
    
볼리비아에서 언제 또 이토록 깨끗하고 싱싱한 식재료를 만나보겠냐며
이리저리 카트를 끌어당기며 그동안 먹고 싶던 채소와 고기들을 한가득 담기 시작했다.
양파와 마늘, 통통한 고추에 단호박 한 덩이까지.
이 정도면 스테이크에 곁들일 채소로 넉넉하기 그지없었다.
    
두둑하게 채소들을 담아두고는 정육코너로 향했다.
기름기를 잘 걷어낸 깔끔한 소고기를 구워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낸 후 
넉넉히 봉투에 담아 마지막 재료까지 깔끔히 채워 넣는다.   



집에 돌아와 양손 가득 봐온 장바구니를 열고 
커다란 냉장고에 하나씩 자리를 잡아준다.


텅 빈 냉장고에 빈틈없이 채워지는 넉넉한 식재료들은

마치 이곳에 아주 오랜 시간 머물 거란 무언의 표식처럼,

어느새 이곳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다는 반증 같기도 했다.

    
재료들을 다듬다 보니 어느새 하늘엔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나지막한 노랫소리를 올린다.
널따란 창밖으로 불그스름한 해가 따스한 기운을 퍼트려놓은 채
슬며시 고개를 감추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저녁을 해 볼 시간이다.    

먼저 잘 다듬어진 커다란 고기에 소금과 후추를 솔솔 뿌려 간이 잘 배도록 놔두고 
다음으로 물기를 머금은 싱싱한 채소들을 다듬는다.
    
양파는 깨끗이 씻어 반으로 싹둑 자르고
단호박은 굽기 좋은 두께로 썰어둔다.
통통한 고추를 한주먹 꺼내어서는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두고
마늘은 지저분한 껍질을 벗기고 말끔히 밑동만 잘라낸다.   


열이 잘 오른 팬에 각종 채소들을 올려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그 사이로 커다란 고기 한 덩이를 보기 좋게 올려놓으면
지글지글 익어가는 맛있는 소리가 침샘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어느덧 고소한 냄새들이 한껏 어울려 씰룩씰룩 코를 간질인다.
 


완성된 요리에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무게를 맞춰 줄
달콤하고 시원한 샴페인을 꺼내 투명한 잔에 쪼르륵 따라낸다.

오랜 시간 달려온 여행의 중턱에 서서,
시원하게 넘어가는 샴페인 한 모금을 따라
괜스레 앞으로의 여행을 위한 조촐한 응원을 건네본다.

오늘만큼은 이토록 포근한 저녁을 풀어놓을 집이 함께하고 있으니 말이다.


변한 거라곤 집이라는 조금 더 넓은 공간에
천천히 흐르는 하루 사이, 

내가 움직여놓은 작은 시간들뿐이건만
이상하게 마음은 더없이 편안하고 느긋하다.

계속해서 움직이고 뭔가를 하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이 순간. 

어쩌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집이라는 또 하나의 공간에서 

익숙한 듯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이 

더없이 행복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늘 여행에서 집이라는 공간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힘들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지친 몸을 기댈 수 있는 곳,

비록 내가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집이지만

집이라는 동일한 공간이란 사실만으로도 지극히 커다란 아늑함과 편안함을 건네주는 곳,

지구 반대편에서 조차 그리워했던 따스함을 찾을 수 있는 곳,

기어이 방황하는 여행자에게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안도감을 주는 곳은

오로지 '집'뿐일 테니 말이다.
    
밤이 깊어가는 사이,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을 쏟아내며 그리웠던 아늑한 온기에 젖어본다.
따뜻한 음식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한가득 쌓인 휴대폰 앨범을 보며 지나간 여행을 추억하기도 했다.

그 사이 속절없이 흘러간 밤은 

어느새 내 머리 위에 반짝이는 별들을 서너 개 띄워놓고는 까맣게 잠이 들었다.

여행에도 가끔은 휴식이 필요하다.
바쁘게 걷던 속도를 늦춰 줄 잠깐의 쉼이 필요하다.


어쩌면 여행은
“여유로운 행복”의
줄임말일지도 모르니까.

기나긴 한 주의 끝에 주말이 기다리는 것처럼,
열심히 뛰는 경기에도 후반전을 위한 하프타임이 있는 것처럼,
여행에서도 가끔은 주말이 필요하고
후반전을 위한 작전타임이 필요하다.
    
지쳤던 몸과 마음을 풀어주고 새로운 열정을 불어넣어 줄 시간.
지금까지의 걸어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위해 걸어가야 할 방향과 기준을 잡아 줄 그 시간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행에서 종종 찾아오는 이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 사랑한다.
지금까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며 걸어온 내 여행을 돌아보고
지금만큼이나 또다시 앞으로 가야 할 수많은 길과 시간을 한 뼘 재어보는 그 시간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다.
    
새로운 걸음을 위해 지쳤던, 혹은 무뎌졌던 걸음에 잠시 휴식을 불어넣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지쳐있던 눈과 귀, 그리고 마음과 걸음은 
하나같이 뻥 뚫린 것처럼 처음의 설렘과 떨림을 되찾곤 한다.
    
무작정 걸어가는 시간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채워주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꾸역꾸역 붙잡아 놓았던 것들, 

놓치고 지나치는 것들을
다시금 눈앞으로 꺼내놓아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쉼에서야 허락될 테니 말이다.



하물며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행에서라면 그 시간은 또 얼마나 커다란 선물이 되어줄까.
몇 개월이라는 잠깐의 틈에서조차 많은 것들을 정돈해주는 이 시간은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길고 긴 직선 위에
더없이 명확한 방향을 가늠하게 해줄 무엇보다 커다란 쉼표가 되어주지 않을까.
    
쉼표를 놓아야 할 시점이 어느 순간 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은 

기어코 답답한 걸음에 쉬이 환기를 시켜 줄 쉼표를 

스스로에게 건넬 수 있느냐 없느냐 일뿐이다.
     

당신에겐 아직 식지 않은 설렘이 채워져 있나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얼마나 관대한 쉼을 허락하고 있을까?
가끔 내 인생에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변화를 위한 작은 쉼표를 찍어주고 싶을 땐,
그 어떤 모습으로라도, 그 어느 때이더라도
작게나마 또는 잠시나마 자신에게 하프타임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지금까지 잘 달려왔는지,
무엇을 위해 여태까지 달려왔는지,
무엇이 그토록 나를 힘들게,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앞으로 무엇을 보고 달려야 하는지,
내가 꿈꾸는 하루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있는지를 물어볼 수 있는 그 시간을 말이다.
 

     
뚜렷한 답이 나오건 나오지 않건
분명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는 시간이 단 한순간이라도 채워진다면 
그로부터 작은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 내 인생의 또 다른 후반전을 위해 끊임없이 물었다.
멈춰 설 줄 모르던 나는 결국 쉼표를 찍어 낸 나에게

끝없는 용기를, 질책을, 응원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그리고 앞으로 새롭게 시작될 새로운 걸음을 위해
쉽게 식어버리지 않을 뜨거운 설렘을 여행이라는 걸음 위에 채워 넣는 중이다.



모두에게나 똑같은 인생은 없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똑같은 하프타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인생이 다 다른 모습인 것처럼, 

하프타임도 각자의 모습을 담아낼 뿐이다.
    
잠시 기대어 앉아 천천히 숨을 고르듯,
지금까지 달려온 나 자신에게 누구보다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나조차도 몰랐던 나 자신에게 오랜 시간 묻고 답하며
가끔 잊혀질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식지 않을 설렘을 만들어 갈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의 가장 뜨거운 전성기는 이제 시작이며,

인생의 가장 화려한 후반전은 결코 시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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