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니스트리 Jan 03. 2024

사라져간 생일같은 매일

연말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문자를 받았습니다.

‘고객님의 사이트가 11월 22일 만료됩니다. 만료 후에는 사이트 접속이 제한되므로 연장하시기 바랍니다.’ 

정확히 2년 전, 한 회사에서 가을 끝 겨울의 시작에 조직 내부의 박수와 함께 퍼블리싱된 사내 조직문화 블로그 트렌버스데이가 떠올랐습니다. 아련한 추억이기도, 또 애증이기도 한 그 블로그는 또한 정확히 5년 전쯤 담당자의 퇴사로 업로드가 종료된 SAPPLE 매거진과도 결이 같았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SAPPLE은 발행을 멈췄지만 그 회사의 성숙한 조직문화는 여전히 더 발전된 형태와 모습으로 내외부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트렌버스데이는 종료 후 방치되다가 결국 서비스 만료로 더는 접속이 불가능해졌습니다. 



트렌버스데이 도메인으로 접속을 시도해 봤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웹 매거진 그 첫 화면 대신 ‘서비스 만료로 접속이 불가하다'는 메시지가 보였습니다. 이미 지나간, 떠나온 과거였지만 왠지 아쉬운 마음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꿈, 희망, 즐거움, 갈등, 고뇌, 환희, 내려놓음의 순간들이 시간의 순서대로 차곡차곡 배열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단서들이 연결되었습니다. 그 회사는 성숙한 조직문화를 위해 무엇을 바랐고, 계획했고, 실행했는가? 나는 그 회사에서 조직문화를 위해 무엇을 꿈꿨고, 시작했고, 이어갔는가? 그리고 무엇이 이 모든 노력들을 마치 없던 일처럼 만들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략의 답으로 연결되는 기억의 조각들이었습니다.



하루의 일과로 하나의 일을 했는데 마치 여러 일을 한 것처럼 바빴던 날은 분명, 뉴스레터를 만든 날일 것입니다. 저는 마케팅을 본업으로 하면서 조직문화를 도왔던 적도 있었고, 조직문화를 본업으로 하면서 마케팅의 다양한 소통 방법을 적용해 본 적도 있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뉴스레터를 중요하게 다루고 이용했습니다. 목적에 따라 그 전체의 색이나 콘텐츠 선별은 조금 다르긴 했습니다. 마치 날이 흐리든 맑든 바지는 입되, 비가 올지 모르니 흐린 날에 밝은 색은 피하는 것과 같달까요?


어쨌든 뉴스레터는 받아볼 대상이 정해지고, 틀을 짜고, 담을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다 보면 한 달이 금세 갈 만큼 생각보다 들일 정성이 많이 필요한 일입니다. 팀 단위로 움직인다면 각 부문의 특파원이 취재한 내용을 취합해 담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그걸 주로 혼자 해야 했던 저는 취재며, 인터뷰며, 정보 탐색과 가공, 이미지와 카피 제작 등 뉴스레터의 'ㄱ'부터 'ㅎ'까지 다루느라 큰 제사를 치르는 시어머니처럼 쉴 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뿌듯도 했고, 남는 것도 많았습니다. 


트렌버스데이는 91편의 콘텐츠를 제작하고 그걸 18번의 뉴스레터에 갈무리해 동료들에게 전했습니다. 첫 뉴스레터가 생각납니다. 동료들의 관심도 컸습니다. 대표는 레터에 회신으로 응원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관심과 응원은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다만 뉴스레터는 소통의 수단에 불과했고, 사실 거의 모든 테마의 콘텐츠는 웹 매거진에 아카이빙 중에 있었고 그건 채용 브랜딩으로도 효과적인 측면이 있어서 지속했습니다. 회사에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이 어느 콘텐츠를 보고 회사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져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정성적인 일이 정량적 평가를 받게 될 때 콘텐츠 기획자는 모호한 느낌을 벗어나 가시적인 성취를 누리게 되는 듯합니다.



그런 트렌버스데이는 이제는 접속이 불가한 죽은 도메인이 되었습니다. 회사는 당장 사정이 어려워지면 먼저 비용을 줄이게 되는데, 가장 큰 부분이 인적 리소스와 겉치레에 드는 비용이므로 그걸 둘 다 관장하는 팀이 왠지 사치라고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팀이 와해되고 함께 문화며, 콘텐츠를 만들어가던 사람들 모두 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담긴 이야기들은 제 기억과 초고들에 있지만 이제 다시 스크린으로 세상에 드러날 일은 요원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열정을 가지고 했던 모든 일이 없던게 된 것에 실망이 컸던 모양입니다. 마케팅 잘 하다가 그 연기처럼 잘 잡히지 않는 오묘한 성취에 중독되어 옛 동료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시작해본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저는 '조직문화 목적의 콘텐츠처럼 허망한 결과물이 또 있을까' 라며 이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품고 마케터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대상만 동료에서 고객들로 바뀌었을 뿐, 뉴스레터를 짓고 또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뉴스레터는 담긴 정성이 아무리 많아도 그걸 열어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쌓이는 자산인데, 조직문화 부문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물론 효과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회사의 방향, 경영자의 생각, 담당자의 노하우 등이 만들어간 문화적 기틀이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이로부터, 콘텐츠로 쓰기 좋은 것들은 쉬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간식바 운영 여부, 생일자 이벤트, 워케이션 등은 좋은 홍보거리는 될 수 있어도 오래 두어도 사라지지 않을 가치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사가 존재하는 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가치는 무엇이 있을까요? 인사 부문에서 기틀이란 무엇일까요?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으나, 마케팅에서 사라지지 않을 귀한 가치는 오랜 시간 커뮤니케이션으로 쌓아 올린 브랜드에 대한 고객의 신뢰이니 조직문화에서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회사가 브랜드이고 구성원이 고객이라면, 그들이 갖는 무한 신뢰의 가치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장 강력한 조직문화 자산인 것과 같이 말입니다.



※이 글은 HR 커뮤니티 <원티드 인살롱>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플루토의 딜레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