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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안 Nov 30. 2022

그래요 나는 개구리라고요

그리고 이 도가니가 살살 끓고 있는 거 안다고요

회사에 3년 만에 돌아온 살바람. 19년도에는 희망퇴직을 받았었는데, 올해는 계열사 전배 신청을 하라는 메일이 왔다. 취지는 '사업 구조 재편'이라고 하지만, 속내는 희망퇴직을 받아서 내보낼 예산조차 없다는 소문이 많았다. 


새삼 놀랍지도 않은 소식이다. 예상된 일이었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 아니었는가? 이미 3년 전에 기울어졌어야 하는 회사인데, '코로나'라는 특수 상황을 만나서 생명을 연장했을 뿐이었다. 올해 하반기 들어서 전 세계적으로 소비가 급감하고, 금리가 치솟아서 이렇게 되었다는 회사의 '설명'이 너무 구차한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재미있는 점은 전배 메일 받은 지 하루 뒤에, 신입사원 채용을 위한 면접 위원 선정 요청 메일을 받았다는 점. 고인 물을 빼내고,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인다는 취지라고 봐야 하나? 하지만 우리 회사의 고인 물든 이런 전배 신청 따위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희망 퇴직금이 없으니까!), 일 잘하는 팀의 중추가 되는 과장 초년차 후배들만 나가게 될 텐데, 인사팀은 진정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오랜만에 진심 궁금해졌다. 이들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퇴직 / 이직 / 전배 / 전출 등등의 단어가 난무하는 쌀쌀한 11월이다. 최근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은 다 이런 키워드의 연장선이었다.


#1

어제는 20년도에 퇴직 후, 동종 업계로 이직을 한 선배와 식사를 하였다. 당시 선배가 퇴직을 했던 상황들, 이유들, 지난 3년간 지낸 이야기들.. 워낙 이야기를 좋아하고,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분인지라, '왜 아직도 그 회사에 있느냐, 어서 빨리 나와야 한다'는 설교를 2시간 내내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그래서 행복하시냐 물으니 그건 또 아니라고 한다. 너무 힘들고 불행한데, 그래도 세상 밖에 나와서 여러 가지를 겪어보는 게 의미가 있다고 한다. 바로 알아듣기는 좀 어려운 말이다.


#2

지난주에는 15년 지기 회사 동료들과 송년회 겸 와인을 한잔씩 했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내내 회사의 부조리함, 무계획성, 실망스러운 모습들과, 우리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어둡고 부정적인' 이야기만 가득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내 선배들은 너무도 편안했다. "뭐가 그리 걱정이야? 우리 회사에서는 절대 잘릴 일 없는 거 알잖아. 너만 마음 내려놓고 있으면 되는데, 니 그 기준이 문제인 거라고." 아, 달라도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요.


#3 

지난주에 인사팀에서 메일을 하나 더 받았는데, 특허청 특별 심사관 공고에 관한 정보 공유의 메일이었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곱씹어보니 이상한 메일 아닌가? 사기업 인사과 팀장이 왜 이런 정보를 굳이 공유해 줄까? 들어가서 읽어보니, 일반적으로 공고된 내용 이외에도, 친절하게 직접 특허청에 문의하여서 받아낸 Q&A도 유첨 되어 있었다. 마지막 문구에 'Senior 연구직의 Second life 설계에 참고하시라고 보내드리는 메일이니,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이 깊게 와닿았다. 역설법을 잘 쓰는 우리 인사팀장님. 희퇴금이 없으니 참 고민이 많으시긴 한 것 같다.


#4

오늘은 오랜만에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데, 팀 막내가 계속 메신저로 말을 걸어온다. 지난주 전배 신청서 결국 냈다고, 어제는 타 업체에 이력서도 써서 제출했다고.. 이 아이의 진심은 무엇일까? "저 흔들리니까, 잡아 주세요 선배"라는 말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진심일까. 무엇이 정답이었든 간에, 나는 후배를 잡지 못했다. 회사가 못나서, Vision을 제시할 수 없고, 적절한 보상도 줄 수가 없는 상황인데, 그를 잡을 염치가 내게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농담 삼아 '이제라도 너를 잡고 싶은데, 질척거려봐도 되겠냐'라는 농담으로나마 소심하게 내 뜻을 비췄다.




재미있는 것은 상황은 하나인데, 바라보는 관점은 참 여러 가지라는 점이다. 누라고는 빨리 튀어나오라고 하고, 누구는 지금 이대로 있어도 아무 문제없다고 한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을 간다는 말도 들었다. 일 잘하는 후배들은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 하고, 일 못하는 후배들은 지금 이곳이 너무 좋다고 한다. 그리고 내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요동을 친다. 곧 침몰할 배에서 하루라도 빨리 뛰어내려야 한다는 비상벨이 울리다가도, 지금 내 일이 너무 좋고, 내 환경이 너무 좋지 않니? 그대로 있어도 지난 15년처럼 아무 일 없이 지나갈 거야 라는 달콤한 안위의 목소리도 속 사귄다. 


어린 시절 읽었던 우화에서, 개구리를 삶는 법이란 글이 있었다. 내가 지금 너무도 좋아하는 이 일이 사실은 나를 삶아 죽이는 도가니 속 온탕이었을까? 인생은 어렵고 지금은 답을 알 수가 없다. 10년쯤 지나 봐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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