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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안 Jan 28. 2023

직책과 직급의 거리

때깔 곱게 먹고 죽은 귀신이 되어야 할까

23년도 신규 아이디어 제출 리스트 작성 중입니다. 메신저 창에 본인 연차를 알려주시면 연차 별 순서를 정하고 공지드리겠습니다


설 연휴에 연차를 붙여서 오랜만에 긴 휴가를 보내고 있는 데, 회사 메신저로 공지가 하나 전달되었다. 아이디어 리스트를 연차 순서로 한다고? 23년도에 새로 선임된 '아이디어 담당자'가 매달 아이디어 작성을 요청하기 귀찮았던 모양이다. 비자발적 아이디어 제출이라는 '아이디어'도 기발한데, 이를 '연차'순으로 한다니 기가 찬다. 오름차순일까? 내림차순일까? 팀 중견급인 담당자의 요청에 후배들은 고분고분 HR 시스템에 들어가서 연차를 확인하고 소수점 한자리까지 공개를 한다. "선임 2.7년 차입니다.. 책임 1.3년 차입니다.."  휴일에 이 기찬 아이디어 때문에 회사 시스템에 들어가기도 싫고, 확인할 필요도 없는 연차라 간단히 적어 보냈다. "책임 >15년 차입니다"


후배들이 낄낄거려서 한동안 메신저 창이 시끌시끌했다. 망할 놈의 회사. 직급은 왜 다 통합해 버려서 책임 두 자릿수 연차가 되게 만들어 버린 거냐.



전사 Task 성공으로 소위 '잘 나가던' 그때 그룹 회장상을 받아서, 1년 연차 상승을 한 적이 있었다. 수석 진급을 앞두고 있던 때라, 예상에 없던 진급 시험을 봤고, 고배를 마셨다. "아직 너무 어려서 그래요. 한해만 더 기다립시다" 전무님이 따라주는 술잔 한잔을 마시며, 그렇게 내년을 기약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회사가 직급 통합을 선언했다. 주임 -선임-책임-수석으로 구성되었던 직급을 선임-책임으로만 단순화시키는 방안이었다. 기존의 주임은 선임으로 명칭을 바꾸어 '자존감'을 고취시켜 주고, 기존 선임부터 수석까지는 '책임'으로 호칭을 단순화시켜 '조직 내 커뮤니케이션을 수평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하였다. 어차피 그 당시 연구소에는 수석이 많지도 않았었고, 나이 어렸던 내가 수석이라는 직급을 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해가 지날수록 회사에 책임들이 넘쳐나면서, 소위 위-아래 구분이 안되기 시작했다. 회사가 목적했던 '커뮤니케이션 수평화'가 이루어진 것인가! 타 부서와의 회의에서 모르는 사람이 참석하면 눈치껏 '책임님'이라고 부르면 되어서 편하긴 했다. 아 물론 회의에서 목소리 높이던 수석들도 좀 사라지기는 했다. 이번 아이디어 담당자의 기똥찬 아이디어처럼, 정말 가끔씩만 책임 연차가 공개가 되어서 나이가 들어감에 대한 감각도 무뎌지는 장점도 있었다.


그런데 직급이 없어지고 나니 직책만이 눈에 도드라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예전엔 팀원이 20명이면 책임 10명, 수석 4명 팀장 1명 정도로 구성이 된 피라미드 구조였는데, 이제는 책임 14명에 팀장 1명인 압정구조가 된 것이다. 아무리 수평 사회를 지향해도 여기는 경쟁사회이고, 남들과 똑같으면 뒤쳐지는 곳이었다. 바꿔 말하면 회사는 직급체계를 통폐합한 것이 아니고 상위 직급의 모수를 엄청나게 줄여버린 것 같았다. (물론 그로 인해 회사가 얻는 이득은, 일은 별로 안 하시고 월급은 많이 받으시던 수석님들의 퇴장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럼 이제는 압정 구조에서 선봉에 서서 탐침이 되어야만 하는데, 팀장은 어떻게 될 수 있을지? 우리 회사에서는 구전되는 몇 가지 사례들이 있다.


핵심 인재의 핀셋 채용

소위 잘 나가는 핵심 인재들은 여러 가지 부서를 옮겨 다니는 Job Rotation 기회가 있고, 그렇게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에는, 윗분의 의중에 따라 핵심 부서의 팀장 자리로 발령이 난다. 그룹 내 1%도 안 되는 핵핵재들의 이야기이니 Pass.


적자 계승

가장 이상적인 팀장 선임의 Case이라 보인다. 좋은 테마의 팀일수록 Resource 투입이 많아지고, 활용처도 많아져서, 어느 시점이 되면 팀을 나누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 경우 본 집에서 분가된 작은 집은 보통 그 팀의 PL이 맡게 되는데, 업무 파악을 할 필요도 없고, 멤버들과의 유대감도 형성이 되어 있는 상태라, 조직 운영이 매우 쉽다. 이 밖에도 팀장이 담당이나 연구위원으로 승진하게 되어 팀장 자리가 공석이 될 경우, 그 팀의 PL이 보통 팀장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세불리기

제일 애매한 케이스인데, 내가 모시던 상관이 좌천되어 다른 조직으로 이동한 케이스이다. 이 경우 본인이 새로운 곳에서 다시 입지를 다지기 위하여, 조직 개편을 하게 마련인데, 이때 보통은 자기 사람을 팀장으로 심는다. 좋은 조직으로 옮겨간 경우는 '당연히 감사'하게 응하면 되지만, 한직이 뻔할 것 같은 조직으로의 '부름'이면 받기도 안 받기도 애매한 경우가 생겨 버린다.



혈기 왕성하던 책임 초년차 때에는 3번 케이스로 발령받아 이동하는 선배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조직에서의 구성원들 텃새에도 힘들어했고, 무엇보다 조직에서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이 가치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일이 너무 재미없다'는 푸념을 많이 들었었다. 그러다가 모시던 상관이 어느 날 갑자기 집에 가버리고, 하루아침에 '적폐'로 찍혀버린 선배가 면팀장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팀장은 올라가기도 어려운데, 내려오기는 더더욱 어려워서, 내려온 이후는 그 사람이 40대이던 50대이던 상관없이 '코끼리 무덤'이라 불리는 면팀장들이 모인 조직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PL이던 시절에는 그렇게 본인 일이 좋아서 열정적으로 일하던 사람이, 독배라 여겨진 팀장자리로 옮긴 이후 괴로워하다 그렇게 몰락하는 모습을 보니 더더욱 '맞지 않는' 팀장 자리에는 회의가 들었다.


하지만 이제 팀에서 가장 선임이 되어버린 책임연차가 되어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여전히 '재미로 회사를 다녔던 놈'이었던 것 같다. 난 늘 내 프로젝트가 너무 좋았고, 회사 생활과 내 프로젝트에서 재미를 찾고 있었다. 그러니 의미 없는 팀장자리로 옮겨간 선배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렇게라도 끌어주는 상관조차 만나기 힘들다는 사실과, 책임 직급에서 연차는 계속 쌓이는데 무직책자를 있는다면 더 이상 회사에서 재미를 찾기도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면팀장님들이 많이 모여 계시던 그 코끼리 무덤 같던 팀에는, 면팀장도 못되고 '늘 책임'으로만 계시던 선배들 또한 많이 계시단 것도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자리의 맞고 틀림을 판단하려는 것 자체가 너무 오만한것은 아니었나 싶다. 그 선배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왜 안했겠나. 하지만 그 자리를 맞는 자리로 바꾸려고 노력했을 부분을 내가 못본 것은 아닐까.


오랜만에 링크드인에 들어가 보니 몇 개의 구직 제안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늘 비슷한 수준의 오퍼이고, 읽은 후 고민 없이 삭제하는 쪽지들이다. 회사 밖에서 나를 바라볼 때는 직급과 직책만 보인다. 내가 회사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고, 내가 얼마나 열정적인 사람이며, 내가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는 보이지도 않고 보여서도 안되지 않겠는가. 결국 언젠가 다음 커리어를 준비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은 허울만 좋을지라도 팀장이라는 직책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먹고 죽은 귀신이 될지라도 그 고운 때깔이 필요한 나이가 된 것 같다.


비슷한 연배와 연차의 동료들과 술 한잔을 하면 '가늘고 길게'와 '굵고 짧게' 루트에 대한 갑론을박이 늘 등장하는 술안주이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다들 가늘고 길 게를 선호한다. '굵고 길게'를 표방해 왔지만 이제는 나도 현실과 타협을 좀 해야 할 나이가 되었고, '굵고 짧게'로 방향을 선회한다. 지금 이 회사에서 뼈를 묻을 것도 아닌데, 나도 때깔이나 곱게 단장하고 나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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