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가 어머님께 집을 다시 짓고 같이 살자고 조른 지 벌써 2년이 지나간다. 21년 초에 서울에 집짓기 프로젝트 라 명명하며 시작했던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평소에는 전혀 관심 없던 세계 경기 지수에 따라서 철근 값이 널뛰기를 하였고, 그에 따라 투입해야 하는 공사비도 억 단위로 변동했었다. 편의성을 고려하는 건물주 입장과 공정성과 안정성을 고려하는 시공사와의 의견 다툼도 일 년 내내 지속되었고, 큰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말 그대로 우여곡절 끝에 집이 완공되었고, 22년 초 우리는 합정동에서 망원동으로 이사하였다. 애초에 빨간 벽돌과 검은색 지붕으로 된 예쁜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딱 그리던 모습의 집이었다.
합정동과 망원동은 인접한 마을이라 사실 거리상의 체감 요인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하철 역과 연결되어 있던 고층 아파트 살이와, 작은 가계들과 시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용한 주택가의 3층 빌라 살이는 꽤 큰 차이를 가져왔다. 지금 이곳 망원동 살이가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으니 다행이다.
가장 큰 변화 부분은 역시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된 점이다. 우리는 어머님 아버님이 위층, 우리가 아래층을 살고 있는데, 주거가 정확히 분리되어 있으니 '같이 살지만, 따로 사는' 효과를 얻었다.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위아래층을 오가며 지내고, 나는 주로 아래층에 머문다. 퇴근 뒤에 사위 저녁까지 챙기시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일찍 퇴근을 해도 주로 혼자 저녁을 준비해서 먹으려 한다. 어머님과 아버님도 딸과 사위의 공간 독립성을 잘 고려해 주시는 편이라, 1년째 큰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다. 가끔 날씨가 좋은 주말에는 테라스에서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BBQ 파티를 하기도 한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대가족 살이를 해보는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인 것 같다.
아이들은 심리적인 안정감이 많이 좋아졌다. 와이프와 내가 둘 다 일이 많아 늦는 날이어도, 할머니가 위층에 계시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큰 아이가 중학교 들어가면서 적응에 힘들었던 시기에도, 하교 후에 할머니와 저녁을 늘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와이프는 이사한 후로 건강이 좋아졌다. 예전엔 집에 돌아오면 저녁도 거르고 픽 쓰러져 잠들기 일 수였는데, 이사 후에는 위층에 올라가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집밥'을 먹기 시작한 뒤부터이다. 물론 이 모든 변화에서, 어머님이 짊어져 주신 짐이 제일 크고 무겁다. 늘 감사한 일이다.
망원동은 한강 공원이 참 가깝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걸어서 5분만 나가면 탁 틔인 한강 뷰를 만끽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예전 집도 한강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다는 점. 길어야 5분 차이? 그런데도 합정동 살이에 비해서 망원동 살이를 시작한 후로 자전거나 한강공원 산책을 훨씬 많이 하게 되었다. 한강과의 인접 거리 차이라기보다는, 고층 아파트와 저층 빌라의 차이였다. 아파트 살이를 할 때는 자전거를 한번 타려고 하면 지하 4층에 있는 자전거 보관소에 가서 자전거를 꺼내와, 공기압 체크를 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잡아서 1층까지 내려가고 출발해야 한다. 지금은? 생각날 때면 그냥 1층으로 '걸어'내려가 자전거를 타고 휙 나갈 수 있다. 시간으로는 10분 남짓한 차이겠지만, '귀찮음'은 1시간 급의 차이였다.
망원동은 한강 산책을 하기에도 편한 곳이지만, 동네 산책 하기에 정말 재미있는 곳이다. 사실 이곳에서 40년을 살아왔고, 10년 전만 하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이다. 망리단길이 활성화되면서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군데는 꼭 새로운 점포가 입점을 하고 있다. 물론 주로 카페와 식당이 많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작은 서점, 액세서리 가계, 푸딩 가계, 파이 가계 같은 곳들도 많이 있다. 날씨 좋은 주말에는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한 바퀴 산책을 하는데, 이곳저곳 둘러서 아이쇼핑 하다 보면 1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작년 가을부터 시작한 목공도 집 근처에 공방이 있어서 다닐 수 있었던 것이었고, 요즘 와이프가 다니는 필라테스도 역시 집 근처에서 찾아냈다. 큰 규모의 점포는 아니지만 잘 찾아보면 있을 것은 다 있는 것이 이 동네의 매력인 듯. 그래서 주말에는 거의 운전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필요한 것은 거의 모든 것을 걸어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생활에서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요즘에는 대형 마트도 잘 가지 않는다. 집에서 5분 거리에 그 유명한 '망원시장'이 있으니, 필요한 것은 여기서 대부분 얻을 수 있다.
망원동 3층 빌라에는 좋은 한강 뷰도, 널찍한 주차장도, 1층에서 아침마다 인사를 해주는 경비원 아저씨들도 없지만, 한강 뷰는 걸어가서 보면 되고, 주차장은 내 전용 한자리만 있음 되는 것이었고, 1층에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맛난 커피를 내려주는 커피숍 사장님이 계신다.
한가한 일요일 낮이 되면, 주차장에서 세차를 하고, 골목에서 아이들과 배드민턴을 치고, 커피숍에서 아라 한잔을 시켜 와이프와 이야기 나누다가, 시장에 나가서 그날의 저녁거리를 사들고 돌아온다. 예전 아파트 보다 집은 좁아졌지만, 내 행동반경은 훨씬 커졌다. 전원주택으로 나가기에는, 도시의 삶이 아쉬울 것 같고, 아파트에 살기에는 대형 공동 주택의 불편함이 싫었던 우리에게는 딱 좋은 중간계를 찾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