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Vol.172 '의좋은 형제'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를 꼽으라면 그 선두에는 서촌과 북촌, 인사동이 있지 않을까. 빽빽한 도심 한가운데 아직도 옛것의 소박함과 정겨움을 느낄 수 있는 동네. 이곳을 함께 걷고 여행하며, 차곡차곡 쌓은 추억은 형제자매, 그리고 가족의 돈독함을 키우는 소중한 양분이 된다.
글 성소영 에디터 윤경민 포토그래퍼 성 데이빛
걷고, 이야기하고, 가까워지기
높은 빌딩 속을 헤집고 살아가는 서울 사람들에게 ‘여유’나 ‘낭만’ 같은 단어는 사치일지도 모른다. 빽빽이 들어선 자동차 행렬과 수많은 인파. 그렇기에 서울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겨 걸을 수 있는 거리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서촌과 북촌, 인사동 일대를 찾는다면 서울에서도 여유롭게 거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고즈넉하고 예스러운 풍경이 가지는 넉넉함과 특유의 분위기는 빌딩 숲에서의 모습과는 분명 다른 매력을 가진다.
그래서 이곳에 갈 때는 차를 두고 가기를 권한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이곳 일대를 거니는 동안 부모에게는 과거를 회상할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추억이 생기기 때문이다. 형제자매 관계에서 ‘우리만의’ 무언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형제자매와 같이 보낸 시간과 기억을 차곡차곡 쌓으며 엄마, 아빠보다 편하고, 친구보다 가까운 최고의 파트너가 된다. 그 견고하고 단단한 관계는 때때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과자집에 찾아온 남매를 잡아먹으려는 늙은 마녀를 함께 물리치고, 비로소 가족을 만났던 ‘헨젤과 그레텔’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전래 동화 중에서도 아이들에게 형제자매 관계의 소중함을 알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다. 시장에 떡을 팔러 나간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집에 찾아왔지만 남매는 기지를 발휘해 호랑이에게서 탈출하고,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동생은 해가, 오빠는 달이 됐다는 이야기 말이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잠들기 전, 캄캄한 방 안에서 동생과 나란히 누워 엄마가 읽어주는 책을 듣는 건 여섯 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도 그때 처음 만났다. 엄마의 옷을 뺏어 입은 호랑이가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는 대목에 닿으면 너무 무서워 나도 모르게 동생의 손을 꽉 움켜쥐곤 했다.
경복궁 경내에 위치한 ‘국립어린이민속박물관’에서는 이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주제로 체험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관 입구에 설치된 스크린관에서 간단한 전시 소개 영상을 본 후, 패널로 제작된 오누이가 웃는 얼굴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전시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팝업북 형태로 꾸며진 캄캄한 숲이 등장한다. 지저귀는 산새 소리, 눈을 번쩍이며 입을 크게 벌린 호랑이의 모습에 마치 동화책 속에 그대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한편에 마련된 광주리 안 떡을 호랑이 입속으로 던져 넣으니 엄마를 위협했던 호랑이의 외침이 들려온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예상치 못한 호랑이의 목소리에 체험을 하던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팝업북 숲을 헤쳐 나가면 ‘이야기하기’ 코너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오누이가 타고 올라간 동아줄을 잡고 언덕을 오르고, 게임을 통해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혼내줄 수 있다. 커다란 책이 텐트가 된 이야기 보따리방에서는 호랑이와 관련된 다른 동화책을 읽는다. 아이들은 전래 동화 속 주인공이 되는 체험을 통해 이야기의 교훈을 보다 깊고 재미있게 이해하고, 위험을 헤쳐 나가는 오누이의 우애 있는 모습을 보며 곁에 형제자매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자연스레 깨닫는다.
전시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내용을 넘어 동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체험으로 풀어냈다. 열두 띠 속의 호랑이, 이야기 속 호랑이 등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해와 달에 대한 과학적 지식까지 탐구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전시는 사전 예약 후 관람할 수 있으며, 관람 시작 시간부터 50분의 제한 시간을 둬 가족끼리 오붓하고 여유로운 체험이 가능하다.
형제자매만의 보물 만들기
국립민속박물관 정문을 통과해 경복궁역 방면으로 걸어 나오는 삼청로 길은 종로에서 손꼽히게 아름다운 길이다. 포근하고 전통적인 매력의 돌담 길을 따라 조성된 작은 화단에는 5월이면 꽃이 만개한다. 형형색색의 꽃잎으로 물든 그 길은 언제 걸어도 붐비지 않아 조용하고 여유롭다. 삼청로를 따라 풍문여자고등학교 방면으로 20여 분을 걸으면 인사동에 도착한다. 인사동 문화의거리 중심에 위치한 쌈지길 지하 1층에는 직접 공예품을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공방이 즐비하다. 각각의 매력을 가진 공방들이 옹기종기 모여 하나의 복합문화공간을 완성한 곳. 그중에서도 ‘커플핸즈’와 ‘마지끄 아뜰리에’는 가족이 공유할 수 있는 소품을 만들기에 더없이 좋은 공방이다.
‘커플핸즈’는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듯 커플 팔찌를 만들 수 있는 곳이다. 원하는 가죽끈과 장식을 고르면 그 자리에서 직접 팔찌를 만드는 키트를 제공한다. 어린이 손님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여러 색깔의 끈을 꼬아 만드는 가죽 팔찌. 끈을 단단하게 땋아 만드는 방법으로 어린 아이들도 엄마, 아빠의 도움만 있다면 20~30분 안에 완성할 수 있다. 팔찌의 중심이 되는 줄부터 작은 부속품 하나까지 함께 고를 수 있기에 완성품은 그 어떤 곳에서도 살 수 없는 ‘우리’만의 보물이 된다. 모든 팔찌에는 이니셜을 새겨 넣을 수 있으니 함께 새기고 싶은 이니셜을 정해보는 것도 좋겠다.
‘마지끄 아뜰리에’는 실크스크린으로 다양한 소품을 만들 수 있는 곳이다.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실크스크린’이란 미술판화기법의 한 분야로, 원하는 이미지의 실크판을 만들고 그 위에 잉크를 밀어 찍어내는 생활공예기법이다. 패브릭, 종이, 나무, 가죽, 금속 등 다양한 소재에 표현이 가능해 더욱 유용하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모든 잉크는 무독성 친환경 제품으로, 아이들 피부에 묻어도 걱정이 없다. 체험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만들고 싶은 제품(가방, 티셔츠, 파우치 등)을 선택한 뒤 마음에 드는 그림의 제판과 잉크를 고른다. 그 후 그림을 찍고 싶은 위치에 판을 올리고, 판 가장자리에 잉크를 균일하게 도포해 밀대로 밀어 문양을 천천히 찍어내면 완성. 마지막으로 난로 앞에서 3분여간 말리면 잉크가 완전히 착색돼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에코백, 티셔츠, 파우치, 손수건 등 다양한 제품에 염색을 할 수 있어 갖고 싶었던 물건을 내 손으로 만드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똑같은 무언가를 나눠 갖는 일은 묘한 유대감을 선사한다. 가족 팔찌, 가족 티셔츠 등 공유하는 아이템이 하나둘씩 늘어갈 때마다 형제자매는 물론 가족의 사이 또한 점점 더 돈독해질 것이다.
흑백사진으로 남기는 추억
쌈지길이 자리한 인사동 문화의거리를 나와 일본 대사관 방면으로 5분여를 걸으면 안국역 3번 출구에 다다른다. 코너를 돌아 현대빌딩을 오른편에 두고 천천히 걸어 오르면 과거로 타임슬립한 듯한 착각이 든다. 북촌 한옥마을의 시작이다. 개원한 지 76년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최소아과 의원’을 지나 얼마간 올라가면 곧장 멋스러운 백색 벽돌의 건물이 보인다. 정통 흑백사진관으로 유명한 ‘물나무’다.
디지털카메라로 쉽고 빠르게 사진을 찍어 소비하는 시대. 방금 찍은 사진을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혁명이었다. 필름이 필요하지 않기에 수천, 수만 장을 찍어도 제한이 없는 반면, 그대로 증발되는 컷이 다반사다. 그래서 ‘물나무’의 존재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완성한 한 장의 흑백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지어진 양은냄비 공장 건물을 그대로 살려 완성한 사진관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북촌의 한 풍경을 완성한다. 내부는 더욱 멋스럽다. 콘크리트가 노출된 투박한 벽에 걸린 흑백사진, 밟을 때마다 삐그덕삐그덕 소리가 날 것 같은 오래된 나무 바닥, LP로 흘러나오는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아우라를 풍긴다.
디지털카메라가 터치 몇 번으로 간단하게 수정할 수 있다면, 흑백사진에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 담긴다. 그저 하얀 벽 앞에 서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이토록 매력적일 수 있는 이유는 사진 찍는 순간의 감정과 분위기, 진실한 표정이 모두 담기기 때문이다. 1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물나무에서는 신중을 기해 7~8컷의 촬영을 한다. 최고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오랜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는다. 덕분에 사진에 담긴 사람들 표정이 하나같이 생생하고 자연스럽다.
촬영이 끝난 뒤에는 암실에서 인화 작업을 한다. 모두 수작업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에 인화된 사진을 받으려면 한 달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기념사진을 얻고 싶다면 흑백 폴라로이드 촬영을 추천한다. 촬영 후 20분 이내에 사진을 받을 수 있고, 흑백으로 찍는 폴라로이드 사진은 일반 폴라로이드와 또 다른 멋이 있다. 단, 필름이 단종돼 현재 준비된 수량만 촬영이 가능하다고 하니 흑백 폴라로이드 촬영을 원하는 가족은 서두르는 게 좋겠다.
함께한 시간이 주는 선물
한나절 동안 특별한 추억을 쌓은 아이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북촌길을 따라 걷는다. 가족이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충만한 행복인지 만끽하는 시간이다. 하루의 해가 점차 저물기 시작하면 오늘의 일정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숙소에 도착한다.
북촌길을 따라 내려와 안국역을 지나 10분여를 더 걸으면 운현궁 근처 작은 골목에 ‘문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종로에서 하루를 묵어야 한다면 역시 한옥만 한 것이 없다. 문 게스트하우스는 운현당과 별채로 구성돼 있다. 운현당에는 너른 마당과 거실, 부엌, 그리고 숙박을 할 수 있는 5개의 방이 있고, 별채는 독립된 마당과 대문, 3개의 방과 거실이 자리해 있어 한 가족이 독립된 공간으로 사용하기에 더욱 좋다.
창호지에 비친 은은한 불빛,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이 정겹다. 객실 한편을 장식하는 자개장, 차곡차곡 개켜 놓은 이불은 어린 시절, 엄마의 손을 잡고 찾았던 할머니 댁에서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엄마, 아빠마저 동심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이다.
이곳에서는 다도 체험, 한복 체험도 할 수 있다. 나란히 걸려 있는 색색의 한복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들뜬다. 전통혼례복부터 아이들을 위한 색동저고리까지 다양한 종류와 빛깔의 한복이 구비돼 있으니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오후 늦게까지 아이들과 종로 곳곳을 걸으며 바쁜 하루를 보냈으니, 저녁에는 굳이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고 한옥집에서 여유를 느끼는 것도 좋겠다. 마당을 놀이터 삼아 뛰어노는 아이들을 툇마루에 앉아 잠잠히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저물 것이다.
생각해보면 삶의 찬란한 순간은 엄마, 아빠의 품에서 형제자매와 울고 웃었던 그 어린 시절에 있었다. 즐거운 하루를 공유하는 것만큼 깊은 우애와 신뢰를 쌓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시간은 흘러 떠나지만 추억은 남아 절대 떠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함께 웃으며 보낸 그 충만한 시간은 앞으로도 내내 아이들의 마음속에 머물 것이다.
INFO
국립어린이민속박물관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7 국립민속박물관
문의 02-3704-4540
쌈지길 체험공방
주소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44 쌈지길 내 B1
문의 마지끄 아뜰리에 010-2188-7965 / 커플핸즈 070-7740-3950
물나무
주소 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84-3
문의 02-798-2231
문 게스트하우스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삼일대로32길 31-18
문의 02-745-8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