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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폴라리스 Mar 30. 2017

성교육하는 엄마들

월간 <폴라리스> Vol.174 '당당하게, 성교육'

검은 천 아래, 좁고 답답한 공간에 5명의 엄마들이 몸을 작게 움츠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다. 40여 분 동안 쭈그려 앉아 무거운 인형을 높이 치켜들고 공연을 하다 보니 매일 온몸은 저리고 뻐근하다. 그래도 성폭력예방인형극단 ‘피노키오’를 이끌고 있는 엄마들은 즐겁고 행복하다. 아이들이 더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세상을 위해 조금은 도움을 보태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에디터 윤경민  포토그래퍼 강봉형







엄마들의 인형극

이른 아침, 아이들로 가득한 어린이집에 검고 큰 가방을 한두 개씩 어깨에 짊어진 수상한 아줌마들이 모였다. 조금은 비장한, 약간은 들뜬 듯한 모습의 아줌마들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가방 속에서 별난 물건들을 꺼내 텅 비었던 강당을 순식간에 작은 공연장으로 바꿔 놓는다. 나무 판으로 가벽을 세우고 큰 천을 덮은 후 색색의 부직포로 만든 소품으로 배경을 꾸민다. 의자 위로 올라가 까치발을 들고 현수막도 건다. 극의 순서대로 등장할 소품과 인형들을 무대 뒤에 세팅하고 스피커를 설치해 음향을 체크하는 것도 모두 이들의 몫이다. 능숙한 솜씨로 무대를 설치한 이들의 정체는 엄마들이 만드는 인형극, 성폭력예방인형극단 ‘피노키오’의 단원들이다. 전국의 어린이집과 유치원, 보육원 등을 방문해 인형극을 통해 아이들이 건강한 성 가치관을 키우며 성폭력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고, 양성평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날의 공연은 총 3부로 구성된 성폭력예방인형극이다. 단원들은 40여 분의 공연을 통해 아이들에게 ‘똥침’과 역할놀이 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장난을 예로 놀이와 폭력의 차이를 설명하고, 좋은 접촉과 나쁜 접촉을 구분하는 방법과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인형극 속에 등장하는 상황은 아이들의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이다. 또 아이들이 판단하기 힘들 수 있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극을 관람하는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해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게 한다. 아빠의 친한 친구가 비밀이라며 내 몸을 만지거나 보려고 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 비밀은 지켜야 하는 건지 인형들은 아이들에게 의견을 구한다. 또 예쁜 강아지를 보여주겠다며 놀러 오라는 동네 아저씨를 따라가도 되는지, 어떤 상황일 때 부모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따라가도 되는지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위험한 상황을 직감적으로 느낀 아이들은 주인공의 몸을 만지려는 아빠 친구를 향해 “하지 마!”라며 외치기도 하고 이런 비밀을 지켜도 되는지, 동네 아저씨를 따라가도 되는지 의견을 묻는 인형에게 “안 돼!”라며 허겁지겁 큰 소리로 말리기도 한다. 아이들은 인형극 속 주인공이 돼 함께 위기를 모면하고 상황을 이겨낸다. 아이들에겐 백 마디 말보다 더 확실하고 또렷한 경험이다.
‘피노키오’는 안산YWCA 여성과성상담소에서 운영하는 인형극단이다. 지역의 성폭력 예방과 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해 활동해 오던 안산YWCA 여성과성상담소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아동 성폭력 범죄를 보면서 아이들을 위한 성폭력 예방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2002년 ‘성교육 인형극 지도자교실’ 강좌를 열어 어린이를 위해 함께 인형극을 이끌어갈 단원들을 모집했다. 그렇게 모인 단원들은 한 번도 무대에 올라본 적 없었던, 연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던, 성교육이라고는 제대로 받아본 적도 없었던 보통의 엄마들이었다. 미숙하고 부족했지만 단원들은 내 아이,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꼬박 1년 동안 성교육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교육을 받고, 인형을 제작하고 움직이는 방법 등을 배우며 공연을 준비했다. 그렇게 시작한 공연은 어느덧 15년째 이어졌고, 피노키오는 무려 800회 이상의 공연을 진행한 베테랑 인형극단이 됐다. 긴 세월 동안 멤버들도, 인형의 얼굴도, 대본도 바뀌었지만 아이들이 상처 없이 꽃길만 걷길 바라는 엄마 단원들의 마음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따뜻하고 뜨겁다.





내 아이와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


현재 피노키오는 2002년부터 함께한 창단 멤버인 이인숙 씨부터 올해 새롭게 영입한 신참 멤버인 이수진 씨, 전미화 씨까지 총 7명의 단원으로 구성돼 있다. 성격도, 가치관도, 살아온 방식도 모두 다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은 ‘엄마’라는 이름 하나로 똘똘 뭉쳤다. 엄마이기에 아이에게 올바른 성교육이 얼마나 필요한지, 유아 성범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무서운지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 걱정과 고민이 이들을 피노키오로 이끌었다. 혹시 내 아이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이 스물두 살, 스물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 인형극단을 지키고 있는 김명희 씨도, 친구의 추천으로 피노키오를 알게 돼 벌써 9년째 활동을 하고 있는 문미숙 씨도, 이제는 어엿한 성교육 전문강사로서 강의까지 다니는 배미라 씨도 처음엔 그저 내 아이의 성교육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 인형극을 해?’라며 낯설고 무섭기까지 했지만, 아이들이 성에 관심을 보이는 시기라 성교육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이기도 하고 인형극이라는 게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딱 맞춤형 교육 방식이라 저희 아이들에게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일이었어요.”
‘내 아이를 위한 성교육’이라는 작은 꿈은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가 직접 인형극을 공연하면서 이미 다 이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피노키오에 남아 있는 이유는 이 활동이 얼마나 의미 있고 보람되며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늘 공연을 마치고 어린이집 화장실에 잠시 들렀어요. 한 아이가 문을 열고 볼일을 보는 친구에게 ‘오늘 본 인형극에서 다른 사람 앞에서 함부로 옷을 벗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왜 문을 열고 있어!’라며 혼을 내더라고요. 어린 아이들은 전달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려고 하는 유일한 대상이죠. 그래서 유아 성교육이 더욱 중요하고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에게 올바르고 건강하게 성을 교육한다면 그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 또한 올바르고 건강한 성문화를 가지게 될 테니까요. 그런 사회에서 아이들이 성에 따른 차별 없이, 성으로부터 안전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이다. 필요한 교육은 찾아 듣고, 더 완벽한 공연을 위해 끊임없이 대본을 수정하며 회의를 통해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최근에는 양성평등 인형극에 필요한 인형들을 모두 새로 만들기도 했다. 강사를 초빙해 인형을 제작하는 방법을 배운 후 직접 스펀지를 깎아 얼굴을 조각하고 천을 꿰어 옷을 만들었다. 공연에 필요한 모든 인형과 소품은 이들의 정성과 애정이 녹아 든 하나의 작품이다. 수십 번 연습하고 만든 더빙도 아쉬움이 남아 이번에 다시 녹음할 예정이다. 각 역할에 누구의 목소리가 더 잘 어울리는지, 함께 대사를 주고받는 목소리는 조화로운지 등 쉽게 놓치고 지나갈 수 있는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고민하고 신경 쓰는 모습에 인형극에 대한, 아이들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잖아요.
그래서 양성평등 교육은 무엇보다
부모가 가정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중요해요.





조금은 나아진 세상

평균 나이 46세. 다들 특별히 성교육이라는 걸 받아본 적 없었다. 학교에서조차도 성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던 세대다. 성교육이라야 친구들끼리 몰래 돌려보던, 지금 보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가득한 ‘빨간 책’이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성 지식뿐 아니라 성 의식과 성 평등에 대한 가치관도 형편없던 시대였다. 들어는 봤나?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지금에야 큰일날 소리지, 예전에는 집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였다. 최근에 입단한 단원들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초기 멤버들은 여성단체인 피노키오에 가입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어딜 여자가 남사스럽게 성을 얘기하냐고, 시끄럽게 여자들이 모여서 뭘 하냐며 많은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11년 전 피노키오에 입단한 배미라 씨 또한 남편의 구박을 받으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시대의 남자들이 그렇듯 저희 남편도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서 매우 가부장적인 사람이에요. 양성평등이라는 단어도, 여자들이 모인 단체라는 것도 못마땅해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집안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조금씩 시작했죠.”
잔소리도 들어야 했고 가끔은 불만의 눈초리도 감내해야 했지만, 단원들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결혼 후 점점 희미해져 가던 나를 찾게 됐고, 항상 뒷전으로 미뤄뒀던 내 목소리도 높이게 됐다. 당당해지고 활기를 찾는 아내들을 보며 어느새 구박만 하던 남편들도 이들의 활동을 응원하고 자랑스러워하게 됐다. 아빠들이 엄마들의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니 가정 내에서의 성 평등 교육도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남편들이 이제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을 따라 식사 후에는 그릇을 설거지 통에 가져다 놓고, 일요일에는 직접 설거지도 한다. 대청소를 할 때는 아이들과 함께 역할을 분담해 같이 청소도 한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여기까지 오기가 절대 쉽지만은 않았다. 아직 성 의식이나 양성평등이 사회적으로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과거에 비하면 그래도 참 많이 발전했다고 단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육아와 가사 노동에 동참하지 않는 남편 때문에 여자들이 얼마나 힘든지 저희는 직접 겪어봤으니까 알잖아요. 그것 때문에 싸우고 뒤에서 흉보고…. 아이들의 행복한 미래와 가정 생활을 위해서 다른 건 몰라도 남녀의 균등한 가사 노동에 대한 개념과 습관은 가정에서 길러줘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잖아요. 그래서 양성평등 교육은 무엇보다 부모가 가정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중요해요. 엄마와 아빠가 함께 요리하고 청소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따로 교육하지 않아도 그대로 보고 배우거든요.” 
수백 번을 해온 공연이지만, 여전히 피노키오의 단원들은 아이들 앞에서 인형을 들 때마다 긴장되고 조심스럽다. 아무래도 재미보다는 교육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작품이다 보니 자유롭게 공연을 즐길 수만은 없다. 피노키오의 단원들은 지금보다 더 성숙한 세상이 오면 그 부담감을 조금은 내려놓고 더 즐겁고 편안하게 공연을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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