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폴라리스> Vol. 173 '꼬마 여행자를 위하여'
여행이 아이들의 감성을 키우고, 충만한 행복을 느끼게 하는 활동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타인과 자연, 지구가 짊어져야 할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공정여행은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이 되지 않도록 하는 착한 여행이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내 아이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이가 행복해지고, 지구를 망가뜨리지 않는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글 성소영 에디터 박은아 포토그래퍼 강봉형 사진 및 자료 제공 낭만판다 출판사, 박선아, 트래블러스맵
환경과 현지인을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여행
여행지에서 내가 쓴 경비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여행객의 행동 하나하나가 지역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생각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공정여행의 시작은 ‘나의 즐거움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공정여행이란 무엇일까? ‘여행’ 앞에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 ‘공정(公正)’을 수식어로 가지는 이 여행은 이름 그대로 공평하고 올바른 여행을 일컫는다. 여행지의 문화와 현지인의 삶을 존중하고, 동식물의 희생을 야기하지 않으며, 그곳의 주민들이 운영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 이로써 여행객이 사용하는 경비가 현지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환경을 보전, 지속가능한 여행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공정여행이다.
공정여행 가이드북인 <희망을 여행하라>에 따르면 한 사람의 여행자가 여행을 할 때 평균적으로 3.5kg의 쓰레기를 만들고,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주민 30명이 쓸 분량의 전기를 소비한다고 한다. 고급 호텔의 객실 한 칸에서는 1.5톤의 물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여행객들이 단 하루 동안 머물며 사용한 양이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 높은 여행지인 제주도에서는 흑돼지쇼, 돌고래쇼 등 동물을 내세운 공연이 큰 인기를 끌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돌고래 공연업체가 불법 포획한 야생 돌고래를 사들여 돌고래쇼에 동원하기도 한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등은 한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지만 정작 관광수입은 현지 주민들이 아닌 대기업 호텔 체인, 유명 여행사, 대형 쇼핑몰 등 거대 자본의 몫이다. 이 때문에 이곳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한 채 구걸이나 호객 행위, 관광객에게 판매할 기념품 등을 만드는 미성년 노동에 이용된 채 살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무조건 시설이 훌륭한 고급 호텔만 검색했다면, 짐을 쌀 때 일회용품부터 챙겼다면, 낯선 여행지에서도 일상에서 쉽게 접해왔던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동물을 이용한 쇼를 감상하며 즐긴 적이 있다면, 이제 공정여행을 생각해봐야 할 때다.
아이와 공정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유럽에서는 1980년대부터 공정여행이 움트기 시작했지만, 국내에서는 2009년에야 공정여행 상품이 처음으로 출시됐을 정도로 아직 걸음이 느리다. 공정여행 패키지를 운영하는 여행사도 소수에 불과하고 지구환경, 동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여행가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 나가고 있는 단계이니 일반인들에게는 ‘들어는 봤지만 실천하기는 부담스러운 여행’이라는 인식이 큰 것이 사실.
특히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여행은 아무리 편한 리조트 여행이라 할지라도 엄마, 아빠에게 큰 각오를 필요로 한다. 하물며 낯설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공정여행을 선뜻 시도하기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전문적인 여행 지식과 풍부한 경험이 뒷받침돼야 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의 기준을 ‘저렴하고 편안한 것’에서 ‘공정한 것’으로 초점만 살짝 바꾸면 공정한 여행을 하는 착한 여행객이 될 수 있다. 국내보다 환경이 열악한 제3세계에 가서 고생스러운 경험을 하는 것이 공정여행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기쁨이 자연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고 현지 주민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미 공정여행의 기본은 충분히 갖춘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이와 단둘이 필리핀, 인도네시아, 라오스, 캄보디아 등을 공정여행한 뒤 책으로 펴낸 <착한 성장 여행>의 저자 박선아 씨는 아이와 함께하는 공정여행에 대해 “작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보다 느끼고 얻을 수 있는 게 훨씬 큰 여행”이라 말한다. 딸 유진이가 말하는 엄마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가장 뿌듯했던 일도 “라오스 친구들에게 내가 아끼는 학용품을 나눠줬을 때”라고. 다소 힘들고 불편할 수 있는 이 여행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다.
간단한 수칙만 지킨다면 짧은 가족 나들이 또한 공정여행이 될 수 있다. 단, 여행의 모든 순간마다 ‘공정여행’을 염두에 두면 즐거워야 할 여행이 괴로워질 수 있으므로 한 번의 여행에서 실천 가능한 한두 가지 정도의 수칙을 정해 시도해보자. 아이에게 우리 가족이 이번 여행에서 지켜야 할 수칙과 이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함께 지켜나가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착한 여행의 보람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1. 지구를 먼저 생각하기
환경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든 행동은 공정여행의 훌륭한 수칙이 된다. 여행지에서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고 샤워할 때 물을 아껴 쓰는 것 등의 활동이다. 탄소 배출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KTX, 기차 등을 타고 떠나는 여행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낭만적이고 매력이 있다. 지구를 지키는 여행은 동물에 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가학적으로 길들여진 동물의 쇼를 관람하는 대신 여행지의 자연 속을 거닐어보자. 모피, 깃털, 상아 등 생물을 이용한 상품이나 기념품을 사지 않는 것도 필수다. 특히 해안 지방, 동남아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조개껍데기 목걸이는 껍데기를 활용한 것이라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상품을 만들기 위해 조개를 대량으로 잡아들여 많은 종류의 조개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2. 현지인과 친구 되기
여행지에서 만난 시장 상인, 숙소 주인, 마을 주민과 친해지는 경험은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현지 주민을 만나기 위해서는 고급 리조트나 호텔에서 나와 지역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에 공정여행의 취지와도 알맞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아이에게 “우리가 여행에 가서 만날 새로운 친구에게 줄 선물을 만들자”고 제안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선물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를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접기를 하는 등의 활동으로 아이들은 자연스레 타인과 마음을 나누는 자세를 갖게 된다. 해외여행을 떠날 때에는 간단한 현지어를 연습해보자. 이에 앞서 선행돼야 할 것은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다. 의복에 제한이 있는 종교 시설에 갈 때는 규정에 맞게 옷을 입고, 현지인들에게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등의 행동은 삼가야 한다.
3. 여행 경비의 1% 기부하기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인 여행 경비의 1% 정도를 현지 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역사회의 소외된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이름, 또는 온 가족의 이름으로 함께 기부를 하면 여행의 행복한 추억을 하나 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해외여행 시에도 마찬가지. 길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1달러를 준다고 해서 아이들의 빈곤을 해결할 수는 없다. 안타깝고 동정심이 일더라도 눈을 질끈 감고 지나친 뒤, 현지 아이들을 위한 단체에 그 돈을 기부하도록 하자. 그것이 아이들을 돕고 마음을 나누는 진정한 방법이다.
4. 윤리적 소비하기
윤리적 소비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실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다국적 호텔 대신 현지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백화점 대신 지역의 전통시장을 이용하면 된다. 밥을 먹을 때에도 유명하고 익숙한 프랜차이즈보다는 현지에 사는 주민들이 즐겨 찾는 식당을 방문해보자. 여행을 떠나기 전 지역에서 열리는 플리마켓이나 공정무역 제품을 판매하는 가게를 검색해보고 가는 것도 방법이다. 이렇게 지역민에게 경제적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여행은 현지인은 물론이고 여행객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처음에는 모든 게 갖춰진 대형 시설 대신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게 귀찮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해당 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어 아이에게도 훌륭한 경험이 된다.
참고 도서 이매진피스 임영신·이혜영 <희망을 여행하라>, 박선아 <착한 성장 여행>
자연과 문화, 즐거움이 공존하는 지역을 착한 방법으로 여행하는 것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 아이와 함께 방문해도 힘들지 않고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는 공정여행지를 소개한다.
소박하지만 마음 따뜻한 여행
지리산 둘레길 & 섬진강변
시골 할머니의 집을 가듯 아이 손을 잡고 지리산 둘레길과 섬진강변의 작은 시골 마을을 산책하는 시간. 옛 마을 풍경을 발끝으로 느끼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몸소 만끽할 수 있다. 공정여행 전문 여행사 트래블러스맵의 지리산 둘레길 여행 프로그램에는 18세기에 지어진 한옥에서 옛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배우고, 전통을 지켜가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마련돼 있다. 동네 주민들만 알고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수달생태보존지구를 지나게 되는데 운이 좋으면 수달을 만날 수도 있다고 한다.
원시림에서 만나는 자유
강원도 인제 곰배령
요즘 아이들은 채소가 마트에서 자라는 줄 안다. 곰배령은 그런 아이들에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산림자원 보호지역으로 1년에 8개월만 입산이 허용된다. 마을 할머니들이 콩자루를 이고 장을 보러 넘어 다니는 완만한 경사길을 아이와 가볍게 걸으며 희귀 및 멸종 위기의 다양한 식물종이 가득한 깨끗한 자연을 즐길 수 있다. 곰배령으로 공정여행을 떠나면 들꽃과 숲이 어우러진 원시림의 아름다운 풍경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코끼리와 진짜 친구 되기
태국 치앙마이(엘리펀트 네이처 파크)
태국 여행을 떠올릴 때 언제나 선두에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코끼리’다. 코끼리 타기 체험은 물론 코끼리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가방, 코끼리 상아를 깎아 만든 목걸이 등의 기념품이 얼마나 많은지 태국 여행을 가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트레킹과 쇼에 이용되는 코끼리가 아닌 자연에서 살아 숨 쉬는 코끼리를 만나러 떠나보자. 학대 받는 코끼리를 구조해 치유와 재활을 돕는 엘리펀트 네이처 파크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코끼리 먹이를 주고, 목욕을 씻기는 활동으로 동물과의 교감을 나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