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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폴라리스 Mar 28. 2017

상식 밖의 사회성

월간 <폴라리스> Vol. 169 '반가워, 사회성'

누군가 나를 함부로 판단하고 오해하는 것만큼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사회성은 매우 억울하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조금 다른, 사회성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을 파헤쳐 그 억울함을 풀어봤다.


에디터 박은아   포토그래퍼 강봉형


눈치력이 곧 사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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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만 있어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사회생활의 기본은 눈치’라는 등 눈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은 속담만큼이나 보편적인 인생 잠언으로 통한다. 실제로 대화의 맥락에 상관없는 말을 늘어놓거나 타인의 기분을 읽지 못하는 ‘눈치 꽝’인 사람은 관계에서 겉돌기 십상이다. 하지만 눈치를 잘 보는 만큼 사회성이 높아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타인을 많이 의식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질지를 많이 의식한다는 의미다. 진정으로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 사람을 궁금해 하기보다는, 상대의 마음과 필요를 읽고 그가 원하는 적절한 반응을 함으로써 인정받을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심각할 경우에는 ‘저 사람이 이걸 좋아할까?’ ‘이렇게 행동하면 싫어하겠지?’ 등을 쉼 없이 고민하고 눈치를 보는 사이 타인의 시선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상대의 말에 담긴 진심과 소통의 즐거움 등 관계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한 눈치력이 아이러니하게도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온갖 감각의 날을 세워야 하는,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때문에 계속 남의 눈치를 보다 보면 나 자신을 위한 에너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실제로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두통, 복통, 근육통, 어깨 결림, 만성피로 등을 많이 앓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니 눈치력은 적당히, 필요한 만큼만 발휘하자. 어차피 인간은 애쓰지 않아도 타인을 신경 쓸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니까.


내향적인 사람은 사회성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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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처럼 내향적인 사람들은 ‘나는 내향적’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하기 힘들다. 내향적인 사람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열성인자로 보는 시선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향적인 사람들은 정말 사회성이 떨어질까? 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는 사회성의 정의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회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으레 활달하고 인간관계의 폭이 넓은 사람을 떠올린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많지만 친밀한 관계는 없거나 독불장군 스타일의 리더십을 지닌 사람을 단지 외향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성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성은 단순히 사교적인 성격이나 연락처에 등록된 사람 수, SNS 글의 하트 수로 책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 능력과 배려심, 도덕성, 감정 조절 능력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난다. 따라서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지 않거나 말수가 적다는 이유로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편견인 것이다.

내향적인 사람에 대한 또 하나의 편견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내향적인 사람은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기 때문에 외향적인 사람에 비해 인간관계를 통한 자극이 덜 필요할 뿐, 결코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실제로 윌리엄 플리슨의 연구에 따르면, 내향적인 사람도 외향적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어울렸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내향적인 사람도 인간관계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안다. 다만 외향적인 사람이 10명의 사람과 10시간을 보낸 후에야 ‘아, 즐거웠어’라며 만족한다면, 내향적인 사람은 1명의 사람과 1시간을 함께 보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이제 내 시간을 보낼 차례야’라고 생각할 뿐이다.

문명은 옳고 야성은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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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괴성을 지르고, 통제 불능으로 뛰어다니던 아이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얌전하게 음식을 먹고, 공공장소에서의 규칙을 지킬 줄 아는 ‘문명인’으로 성장해간다. 소속 사회의 가치와 규칙, 규범 등을 배우며 사회성을 키우는 과정은 중요하고, 또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화가 긍정적인 측면만 지니고 있을까?

현대사회는 모든 면에서 이전보다 체계적이고 고도화된 시스템을 자랑한다. 이는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에도 고스란히 적용돼 아이들은 부모와 교사에 의해 정교하게 기획된 환경에서 양육되고 교육되며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저마다 타고난 개성의 뿌리는 힘없이 시들어간다. 세상이 복잡해진 만큼 늘어난 질서와 지식들 틈에 타고난 야성의 에너지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그런데 여기 흥미로운 연구 사례가 하나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과 하와이 대학, 퍼듀 대학 합동연구팀이 7~19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사춘기를 지나면서 둘째 아이의 모험성과 독립성이 맏이에 비해 두드러지게 높아진 것이다. 과학사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프랭크 설로웨이 역시 저서 <타고난 반항아>를 통해 “맏이들은 체제에 순응적이고 보수적인 반면 모험적이고 반항적인 기질은 동생들에게 더 나타난다”며 “역사를 바꾼 혁명가들은 주로 동생으로 태어난 이들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모든 가정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동생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맏이에 비해 부모들의 기대와 통제를 덜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양육 환경이 반항심을 자극하고 기존의 체제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는 성향을 만들어냄을 짐작해볼 수 있다.

‘말 잘 듣는 아이’는 어른을 편하게 한다. 그러나 자라서 세상을 변화시킬 아이는 순응적인 아이가 아닌 내면의 야성이 살아있는 아이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넘치는 에너지로 세상을 휘젓고 다녀야 할 ‘톰 소여’들을 사회화라는 명목하에 울타리 안에 가둬놓는 것은 서글프지 않은가.





참고 도서

크리스 메르코글리아노 <길들여지는 아이들>, 박진영 <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박근영 <왜 나는 늘 눈치를 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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