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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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줄 이어가듯 늘어져버린 1,2월
무엇보다 에너지가 소진되었다라는 것이 이렇게 실감될 줄 몰랐다. 올 1월 조명 프로젝트까지 마무리를 하며 마음 깊숙히 남은 조금의 에너지까지 모두 끌어 사용한 탓인지, 정말 온 몸이 무기력하고 기력이 없는 한 해를 보내고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마음은 힘들지만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되려 기분은 좋다는 것이다. 플베 제품들이 조금씩 알려지고, 주문이 조금씩 들어오고 협찬 문의가 들어오기도 하고, 팔로워분들도 2000분이 넘으셨다.
보람에도 불구하고 기력이 떨어지니 몸이 따라주지 않음이 날 더욱 힘들게한다. 마음은 백번 움직이지만, 몸은 그렇지 않았다. 입으로는 10번도 더 할 것들, 몸으로는 1번조차 힘들게 되었고, 원인 모를 불안감을 행동을 위한 명분을 숨기고, 이것은 순환이 되어 계속 나의 몸과 마음을 조금씩 조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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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고통스럽다.
살아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변화에 둘러쌓여 있기에 나는 항상 최고의 상태일 수 없다. 그럼에도 세상은 야속하게도 흘러간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시간만큼 내 시간은 사라진다. 야속하다. 그래서 더 괴롭다. 고통을 공감받지 못한 환자의 마음 만큼이나, 잔인한 현실이기에 어쩔수 없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통의 연속에서 문득,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고통스러운가. 이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나는 고통스럽다.
그 고통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끊임없는 변화와 불안에서 발생하며
변화의 소용돌이들은 내가 살아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크고 작은 소용돌이들 속에 서있는 것이 인생이기에, 인간은, 나는 고통스럽다. 미약한 중생이기에 세상 풍파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특히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라온 나에게, 인간들에게 결국 현생은 불안의 고통으로 가득한 작은 지옥이다.
결국 나의 삶에서 고통은 무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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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숭고하다.
불쾌함이 쾌로 변환되는 순간, 우리는 숭고해진다. 압도적이고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 속에 자아를 유지한 채 목숨을 유지한 나를 보며, 아무것도 없는 무의 존재에서 의미를 찾아내고자 할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자아"를 확인하게 되고, 그 "자아/정신"이 숭고함이 되는 것이다.
결국 나(인간)의 인생은 항상 고통스럽기에, 풍파속에서 결국 돛을 잡아내며 끝까지 항해해나가는 나를 스스로 바라볼 수 있기에, 나는 숭고한 사람인 것이다. 가끔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몇 푼에 비굴해지기도하고, 욕설을 하면서 천박한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곧은 정신으로 돌아오며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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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통을 받아들이자, 나의 삶이 숭고해졌다.
밤에 별이 빛나듯, 고통을 받아들이자 숭고한 별빛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농담삼아 이야기해왔던, "나의 삶은 수련이다."라는 말이 정말 나의 진심이 담겨있을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단지 참아야하기에 수련이다라고 얕게 생각했던 나였지만, 결국 그 과정은 내가 "숭고해지기" 위한 첫 단계였던 것이었다.
내가 변화와 변수를 싫어함에도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이를 인정받을때 비로소 내 자신이 숭고해지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에게 마치 하나의 사명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숭고한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나의 숭고함은 새로운 콘텐츠라는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었을 때 비로소 발견된다.
느낌표는 돈이 될 수도, 사회적 지위가 될 수도 있다.
결국 나는 숭고해질것이다.
숭고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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