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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파운드짜리 사랑

그들의 절박한 눈에서 나의 20대를 본다.


금발 미용실   <2002년, 안젤라 센>



나는 오늘 머리를 자른다.

오르막길 성당옆 금발 미용실에서


마구 붙여놓은 셀로판지를 덜덜덜 붙인채

토끼처럼 비명하는 쇠미닫이 문

가위 든 아줌마는 성스러운 마리아

두 팔을 뻗어 새까맣게 타락한 내 머리칼을 잘라낸다.  


서걱 서걱 스윽 슥-

겁난 토끼처럼 웅크린 나는 눈이 빨갛다.

서걱 서걱 스윽 슥-

제 머리를 잘라주세요!

제 기억을 잘라주세요!

새까맣고 윤이 나던 긴 머리는 죽은 토끼처럼 투욱 떨어진다.  


가위 든 아줌마는 기술도 좋지.   

세월에 밀려온 가난을 씹어먹고,

상처의 기억은 게워내고

이제 갓 열 아홉을 넘긴 철없는 여자애의 머리를 만져준다.


애써 잊으려 하지 않아도 된단다, 얘야.

온갖 불편한 감정과 기억은 하얗게 탈색이 되고

마침내 정오의 햇빛처럼 금발이 되어 빛난다.  


…오르막길 성당 옆 금발 미용실





   나의 첫 직장은 동 런던의 타워 햄릿 구역에 위치한 지역 약물 중독 센터였다.

중동의 석유 부자부터 전쟁 고아나 난민까지....런던은 세계의 돈이 몰리는 곳인 한편 빈자의 절박함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곳이다. 영국의 부는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지만 수도인 런던 거주민의 30프로에 달하는 인구가 빈곤층이고 그 수치는 영국 전체 평균치보다 높다. 런던 안에서도 지역별 빈부 격차는 매우 커서 동 런던의 타워 햄릿 구의 빈곤층은 무려 60퍼센트에 육박한다.


   런던 사람들은 평균 월급의 54퍼센트를 월세로 내고, 성인의 74퍼센트가 현재 고용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빈곤에 허덕인다. 최근 물가 급등을 겪으며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교사나 간호사 등 평범한 직장인 조차 식재료를 무료 나눔에 의존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런던 인구의 하위50퍼센트는 고작 6.8퍼센트의 부를 차지하고 상위 10퍼센트가 부의 42.5퍼센트를 독식하고 있다. 이러한 빈부격차는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데, 그것은 범죄율의 증가와 만성적인 절망으로 부터 잠깐이나마 도피할 수 있는 마약의 유혹과 같은 것들이다.


   코카인과 헤로인의 시세는 날마다 다르고 ‘딜러’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킹스 크로스 뒷골목에서 그날만 살아가는 거리의 여자에게 오늘의 시세는 그녀의 모든 것이다. 그녀의 몸과 심지어 목숨까지 걸고 흥정하는 그 날의 화대는 헤로인 1그램의 값이 좌우하게 될 테니까.

   한 때 그램 당 시세가 5파운드 까지 떨어진 날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5파운드짜리 사랑을 판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녀의 몸을 헐값에 유린한다.


   “...남자는 구걸하고 여자는 몸을 팔아. 나는 한 가닥 연기의 헤로인에 몸을 팔고 한 줄의 저질 코카인에 영혼을 팔지....”


   씨익 웃는 알리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센터의 문을 닫을 시간인 오후 5시.

   누군가가 다급하게 초인종을 누른다. 문을 열어 보니 ‘막다’가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고 눈이 토끼처럼 충혈되어 있었다. 헤로인 금단 현상으로 그녀는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초식 동물처럼 자잘한 이를 무섭게 갈면서 금방이라도 나를 물 것처럼 위협한다.


   "메타돈 (methadone) 내놔! 메타돈! 나 죽을 것 같아. 주지 않으면 내가 오늘밤에 무슨 짓을 저지를 지도 몰라."


   메타돈은 오피오이드 계열의 약물로 체내의 약물 수치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헤로인 금단 현상을 막아주기 위해 처방하는 약물이다. 나는 우선 그녀를 대기실로 안내한다.

  그녀의 금발 머리는 떡이 져서 여러 뭉치로 갈라져 있었다. 마치 그녀가 바깥에 나가지 못하도록 누군가가 뭉텅뭉텅 잘라낸 것 같다. 그녀의 길던 금발 머리는 어디서 절규하듯 떨어져 나갔을까? 그녀는 잊고 싶은 기억을 어디서부터 잘라내고 싶었던 것일까…


   제 머리를 잘라 주세요!
  제 기억을 잘라주세요!


 오늘도 막다는 무언가를 그렇게 잊고 싶은지 여기까지 도망쳐왔다. 결국 헉헉거리며 돌아온 곳은 같은 자리. 현실로부터 도망친 그곳이 다시 더 지독한 현실이 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내가 지구 반대편에서 젊은 날의 열병을 도망쳐 온 곳이 이곳인 것처럼. 심해처럼 깊고 푸른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는 한 가운데 웅크린 내 모습을 응시하며, 결국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 당시 나는 런던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의 한 구석에서 무척이나 고통받고 있었다. 아마 내가 진료하는 내담자와 함께 이 치명적인 대도시의 부작용을 함께 견뎌내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상담실로 그녀를 안내한다. 그리고 그녀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흐느낄 수 있도록, 마음껏 나약해 질 수 있는 시간을 오롯이 바친다.


   “막다, 여기서는 울어도 괜찮아. 여기서는 무너져도 괜찮아...”


오늘만은 그녀가 거리로 나가지 않도록, 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부드러운 담요를 덮어 준다.  



*모든 등장인물은 가명이며 신분이 드러날 수 있는 모든 정보는 대체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인물 사진은 위의 내용과 무관합니다.

*본 게시글은 '월간 에세이' 8월호에 개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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