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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정 Oct 24. 2019

철 지난 잡지를 제 값 주고 샀다

느린 잡지 <PAPER>에서 찾은 가성비 없는 행복

가성비 떨어지는 책방


 대학생의 방학이 끝나가고 있다. 휴학을 할 예정이라고는 하지만, 9월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 먼 곳에서 들려오는 북소리 같은 기분은 그치지를 않는다. 알바를 하느라 바빴어서 오랜만에 혜화에서 연극을 보았다. 러닝타임이 꽤 길어서, 극장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거리에는 어둠이 가득 차 있었다.  괜히 시간을 허비하고 싶어 술을 마시기로 했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가던 중, 지하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계단을 보았다. 발걸음이 절로 멈췄다. 들어가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냥. 빛이 궁금했다. 이 어두운 골목에 저런 정직한 불빛이 있는 이유가 뭘까? 하고.

 지하에는 책방이 있었다. '서점'이라고 말해주기에는 조금 모자란 구석이 있는 작은 책방이었다. 입간판은 분필로 삐뚤하게 글씨가 써져 있었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양 옆에는 엄청난 양의 포스터들이 빼곡히 붙여져 있었다. 무슨 내용의 포스터인지 궁금했다.


 "5분만 보다 가도 되나요?"

 "네, 그러세요. 지나가다 오셨어요? 덥죠? 물 한잔 드릴까요?"

 

 운영 시간을 10분 남겨놓고 쭈뼛쭈뼛 들어온 내가 야속할 거라 생각했는데, 책방 주인은 능청스럽게 물을 권했다.




 책방은 생각보다 깊었다. 안쪽까지 볼 엄두는 나지 않았고, 앞쪽만 깨작깨작 보았다. 여름에는 SF를 읽으라며 SF 책을 모아놓은 코너, 좋은 출판사의 책들을 설명과 함께 모아놓은 코너, 시리즈 책을 가지런히 꽂아놓은 코너... 주인이 책방을 만드는데 쓴 시간들이 눈에 보였다. 하나하나 정리하며 지금과 같은 책방을 꿈꿨을 테지.

 잡지 코너가 눈에 띈 건 책 한 권을 고르고 결제하기 위해 카운터로 발을 돌렸을 때다. 엄청나게 많은 잡지들이 카운터 근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중에 눈에 띈 계간 <PAPER>. 페이퍼 잡지를 알게 된 건 아주 오래전인데, 실제로 본 건 거의 처음이었다. 괜히 반가웠다.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이랑'의 인터뷰, 그리고 '치앙마이 방황기' 기사가 들어있길래, 한 삼 초 만에 책을 사지 않고 페이퍼 잡지를 사기로 결심했다. 이랑의 말은 항상 궁금하고, 치앙마이는 요즘 내가 향수를 느끼는 도시였으므로. 2018년 봄 호라는 걸 알게 된 건 계산 직전이었다. 작년 잡지가 버젓이 서점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왠지 모를 속은 듯한 기분에 사지 말까, 싶다가도 결국엔 사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고 나니 그깟 날짜가 무슨 대수랴 싶었다. 내가 보고 싶은 기사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서 이월 잡지 무료 나눔 하는 시기를 기다려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장 손에 잡히는 종이의 질감이 만족스러웠다.

 책방 주인이 준 물을 마시고, <PAPER>를 계산했다. 주인은 멀리서 왔을 텐데 영업시간이 짧아 미안하다며 미지근한 박카스 한 병을 건넸다. 참으로 오랜만에 받아보는 넉넉함이라서 기분이 낯설었다. 무엇을 하든 '가성비'라는 말을 사용하는 요즘에, 이렇게 가성비 떨어지게 장사하는 집이 있다니! 나는 그렇게 잡지를 사고 시원한 물 한 컵과 박카스와 어떤 마음을 얻었다.

 

와인바에서 뜯어본 <PAPER>. '걸어도 걸어도'라는 부제목을 한참 쳐다봤다.  요즘 나는 느린 것만 보면 감동받는다.



잘 걷고 있어요


 잡지를 펼치고 가장 처음에 받았던 인상은 '아, 솔직하다'였다. 편집장은 이 잡지가 판형이 작아진 이유, 계간으로 바뀐 이유를 찬찬히 설명했고, 독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편지 같다고 느꼈다.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었던 잡지지만 친밀감을 느꼈던 이유가 이거였던 것 같다.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듯, 독자들에게 한 자 한 자 전하고자 하는 마음. 이 마음이 느껴졌기에 나는 본 적도 없는 잡지를 반가워한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라는 이 달의 제목에 맞게 여러 사진과 글들이 걷고, 걷고 또 걷고 있었다.

 '걷는다'라는 행위에서 느껴지는 인상들을 생각해보았다. 성실, 꾸준, 개미, 길, 무한함, 목적지, 시간, 꼬물꼬물 등 다양하다. 모든 단어는 시간으로 귀결된다. 어느 정도의 시간 소모는 감수하고 시작하는 '걷기'. 우리는 모든 순간을 걷는다. 시간을 걷는다. 흔한 비유지만 걷기를 인생에 빗대는 사람들도 많다. 얼마나 많이 이야기가 되었으면 '기억을 걷는 시간'이라는 노래도 있다. 아티스트 이랑의 인터뷰, 영화감독 장준환의 인터뷰를 보며 둘에게 얻은 느낌도 비슷했다. '참 꾸준한 사람이구나. 잘 걷고 있구나.'

 인간은 이족 보행으로 생을 걷는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소요된다. 자동차를 타거나 순간 이동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가성비가 참 떨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고 걷는다. 걸으면서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렇게 흔한 말을 하기 정말 싫어해서 반대되는 말을 하려고 많이 노력하는데, 그런 내가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걸 보면 이건 범인류적으로 어떤 진리의 차원에 들어선 게 아닌가 싶다.


잘 걷는 이랑의 인터뷰 중.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뻔한 이야기를 지루해하면서도 그런 이야기에 감동받을 때가 참 많은 것 같다.


  외부에서 보는 시선에 민감한 나에게 '대중에게 노래, 글, 작품으로 공감을 얻으려면 나를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죠'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걸 하려면 얼마나 더 용기를 내야 하는 걸까. 나를 그대로 '잘' 드러내려면, 얼마나 더 많은 노하우를 가져야 하는 걸까.



 가성비에서 벗어나기


 너무나 바빠서 쉬는 거라곤 집에서 술 한잔 하는 것밖에 없었던 나는, <PAPER>를 읽고는 조금 여유를 찾고 세상을 둘러보게 되었다. 주변에 너무 재빠른 사람들밖에 없다 보니 나만 뒤쳐지는 기분이었는데, '나와 비슷한 사람이 어디선가 열심히 걷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예전에 읽었던 책 <모모>에서, 회색 신사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시간을 절약할수록 바쁜 삶을 살게 되었다. 사람들이 뛰어가자 길이 아주 길어지고, 모모가 천천히 걷자 길이 아주 짧아졌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제야 그 뜻을 조금 알 것 같다.

 요즈음 우리는 가성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최소 비용 최대 효율'의 법칙을 인간에게도 적용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계도, 공장도 아니다. '가성비 갑 행복'은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가성비'라는 한계를 지어버려 이를 뛰어넘는 행복은 느낄 수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 행복을 찾을 때  '가성비'라는 말은 집어던지자. 가성비에서 벗어나 더 큰 행복을 만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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