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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라이크 Feb 21. 2022

사랑이 지나가야 할 때, 사랑니라뇨

사랑니, 아픔에 대하여

고등학교 때 유행했던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신세경은 이지훈이 자신에게 자꾸 신경을 써줄 때마다 사랑니가 아파왔다. 그리고 가정부인 자신과 그 집의 의사 아들인 이지훈의 처지를 비교하며, 아픈 사랑이라 여기고 그 사랑니를 빼지 않고 고통을 감내했다.


나에게도 오래된 걱정거리 사랑니가 있었다.

며칠 전에 빠진 내 사랑니는 20대 초반 잇몸을 뚫고 살짝 머리를 들이밀었고,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잇몸을 부풀리며 얼굴을 세상 밖으로 들이밀었다. 이 골칫덩어리를 빼기 위해 치과에 갈 때마다 X레이를 찍었지만, 신경에 많이 걸쳐 있어 대학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여러 번 퇴짜를 당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 병원이 무서웠다. 예약부터 진료 심지어 수술은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그 유명세는 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왔다. 아픈 청춘을 즐기고 싶어서였을까? 나는 20대 내내 아프고 거슬렸던 사랑니를 빼지 못했다.


30살이 되고 설날이 찾아올 무렵, 나는 물컹 씹힌 부은 잇몸을 보고 바로 세브란스 병원 내원을 예약했다.

이제는 대학병원을 알아서 가봤어서 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은 이 지긋지긋한 사랑니와 이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 고통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신세경의 부은 사랑니를 보며 걱정한 이지훈이 치과를 여러 번 추천해주었지만, 신세경은 가지 않았다.


그리고 30살에 처음 가본 대학병원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면 별로 어려울 게 없었다.

신경 때문에 X레이와 CT를 찍은 나에게, 영혼이 거의 빠지기 직전인 전문의가 “저희라고 100% 신경을 안 건든다고 할 수 없습니다.”

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해도, 혹시 궁금한 이야기Y에 나오는 대학 병원 의료사고의 사건 당사자가 내가 된다고 해도,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30살이 될 줄도 아무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지난주 금요일 사랑니를 뺐다.

진료시간에 딱 주차장에 주차를 한 나는 그래도 대기시간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올라갔는데, 접수를 하자마자 수술대에 눕혀졌고

심지어 나의 주치의는 외국인 선생님이었다. “따끔따끔”정도의 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순간 눈을 질끈 감고, 나의 20대를 고통스럽게 했던 아이와 이별하기 위해

크나큰 고통을 견뎠다. 아직까지 볼은 퉁퉁 부어 있고, 어제는 하품을 하다가 실밥에 걸려 너무 아픈 나에게 짜증이 나 눈물을 흘렸다.


인간은 이토록 나약한 것인가.

신세경은 이지훈이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아니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서 사랑니를 빼며 눈물을 흘린다.

드라마는 그렇게 엔딩을 맞이했지만, 진짜 고통은 그 후일 것이다


사랑니를 빼고 난 후, 겨우 이 하나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보며.

사랑이 아니 나의 세월이 훌쩍 지나가서 너무 힘겨운 순간순간을 견디고 견디다 좌절할 때도 있다.

하지만 부기가 가라앉고, 어제보다는 입이 조금씩 벌려질 때 우리는 깨닫는다

“아, 고통의 시간이 지나갔구나.”

이제 우리는 이가 하나 없이 살아간다.


그 이는 나의 사랑 었을까, 청춘이었을까, 고통이었을까.

산산이 부서진 사랑니의 마지막은

좋은 안녕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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