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이 끝날 무렵이었다. 한 해가 지루해질 때쯤 찾아오는 새해에 모두가 들떠있을 때쯤 나는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나라는 거품 속으로. 운이 좋아서 얻은 기회들이 있었다. 감사하면서도 내가 가진 능력에 비해 과분한 결과를 누리게 되어 불안했다. 언젠가 내 진짜 모습, 내 진짜 능력이 들키면 어쩌지? 그게 드러날까 봐,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실망할까 봐 두려웠다.
속으로 끙끙 앓던 중에 예전 직장 동료들을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자연스레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다. 동료들은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놀란 눈치였다. 나에게 충분한 자격과 능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다정한 위로가 돌아왔다. 알고 보니 이들도 비슷한 고민을 했었고, 여전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동료가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한 누군가가 링크드인에 올린 글을 공유해 주었다. 그는 글에서 '사기꾼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고백을 했다. 그랬다. 이건 일종의 심리 현상이었고, 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엠마 왓슨과 나탈리 포트만도 앓았던 증후군이었다.
정식 명칭은 가면 증후군으로, 자신의 성공이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으로 얻어졌다 생각하고 지금껏 주변 사람들을 속여 왔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하는 심리이다. 성공의 요인을 자신이 아닌 외부로 돌리고 자신을 자격 없는 사람 혹은 사기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사기꾼 증후군'으로도 불리는 것이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심리학자 폴린 클랜스와 수잔 임스는 이 증후군이 특히 성공한 '여성'들에게 많이 발생한다고 했다.
이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이 운으로 성공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지나친 성실성과 근면함을 보이고, 상사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특징을 보인다고 했다.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높은 수준의 기대를 받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높은 사람들이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겪을 충격을 사전에 완화하려는 방어기제가 이 증후군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반년 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주변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며 잠자코 숨어 있던 자기혐오가 다시 눈을 떴구나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게 발전 없이 현재에 만족하려는 나를 합리화하는 거라고 여겼기에 계속해서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길 바랐다. 그러나 주어진 결과에 오롯이 만족한 적은 없었다. 목표는 더 높아지고 나에게 가해지는 채찍은 더 가혹해졌다.
나라는 주식에 배팅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올라! 하면서 목적지에 다 다르면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높은 가치를 요구하는 배팅. 그렇게 조금씩 정신이 피폐해지고 있을 때 이런 행동이 하나의 심리 현상으로 명명되어 있는 것을 보며 타인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 사이에 오는 간극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이가 나뿐만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에 이상한 위안을 얻었다. 엉켜 있는 실타래의 시작점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그래서 연말에 본 알쓸인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인간 잡학사전) 속 심채경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왈칵 눈물이 났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인간'이라는 주제에서 심채경 교수님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인간으로 꼽았다. 그는 내가 똑똑하기 때문에, 교수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잘못한 점도 있고, 부족한 점도 있지만 그냥 그런 면들끼리 인정하고 수용하는 거잖아요. 어제의 잘못을 한 것도 나고, 실수한 것도 나고. 부족한 면을 받아들이고 발전하려는 것도 나고, 그러다 또 실패하는 것도 나고.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예쁜 모습만 사랑하면 허울만 있는 거죠.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 같은 거죠. 남이 평가하는 저는 5점이나 7점, 실격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라는 심사위원에게 내 점수는 10점인 거죠."
나 자신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구나. 그런 사람에게선 이런 빛이 나는구나. 목도한 순간이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타인에게서 전혀 이기적이거나 거만한 기색 없이 맘껏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을 느꼈다. 나를 몰아세웠던 지난날, 스스로에게 행복했는가 자문한다면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온전한 행복을 누릴 리 만무했다. 그를 응원하고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은 어쩌면 예전의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후로 푹 빠져버린 알쓸인잡의 마지막 회에서는 박사님들을 처음 만났을 때 던진 질문을 다시 했다. '나는 ( ) 인간이다.' 나의 괄호에 들어갈 말을 떠올렸다. 예전의 나는 '완벽하고 싶지만 완벽하지 못해 나를 미워한 인간'이었다. 완벽이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상태인 걸 알지 못했던 지난날, 불완벽의 괴로움 속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자기혐오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것이 건강한 원동력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이렇게 하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이것이 내게는 '약'이라는 체면을 걸어 무기력해질 때마다 주사했다. '넌 아직 멀었어. 더 해야 해.' 나를 사랑하고 싶다는 발버둥이 내게 비수를 꽂는 일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가면 증후군의 존재를 알게 되고, 심채경 교수님의 자기 사랑을 듣고 나니 아빠가 남기고 간 가르침이 떠올랐다. 앞으로 겪을 세상의 모순, 고통, 갈등과 애증 따위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 조부 투바키가 새까만 베이글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저 시끄러운 세상 밖으로 사라지고 싶었던 순간. 아무것도 욕망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허무 속에서 아이러니한 해방이 찾아왔었다.
나에게 부여했던 모든 미션과 역할이 사라지고 남은 단 하나의 목표. 살아내자. 그저 존재하자.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바깥에 나가 사람들을 만났다. 죄책감을 느끼다 못해 보이지 않는 죄수복을 내내 입고 사는 심정이었으므로 나를 들들 볶을 필요조차 없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나를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최선을 다하자는 심정으로 차곡차곡 하루를 살았다.
문득문득 아빠를 지키지 못했다는 최악의 혐오감이 밀려올 때는 한순간 사라지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나를 끌어올린 건 아빠가 꿈속에서 남긴 말이었다. 아빠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꿈에 찾아와 내 손을 붙잡고서는 '보란 듯이 살아'라고 말했다. 내가 너무 미워서 정말로 못 견딜 것 같은 순간마다 이 말이 떠올랐다. 아빠는 눈 감는 순간에도 절대 나를 원망하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 세상에 남겨진 내가 당신의 몫까지 보란 듯이 살다오길 바랄 거라는 믿음과 함께. 이것마저 내 죄책감을 합리화하려는 못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30년 간 아빠가 보여준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는 믿음이 내 의심에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그렇게 나를 살린 아빠의 마음이 가면 증후군으로 헤롱헤롱 거리는 나를 다시 건져 올린다. 지금의 나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어떤 인간일까. 이제 나는 완벽하진 않지만 그런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나를, 그러나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아 자주 한계에 부딪히는 나를, 그러다 이 치열한 일터에서 뒤처질까 봐 두려워하는 나를, 그럼에도 끈기 있게 나아가려는 나를, 욕심 많은 나를, 그 욕심을 채우지 못해 머쓱해하는 나를, 지질하고 겁 많지만 천천히 극복해 나가는 모든 나를 따스하게 안아줄 수 있는 인간.
가끔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속상해할 것이다. 욕심을 따르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순간, 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기보다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한 모습을 인정해주고 싶다. 내가 가진 능력은 처음부터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것보다, 척척 해내고 싶은 일을 잘하기 위해 내가 가진 최선을 발휘하는 것, 그 과정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그걸 찾아내 다음번에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난 것이 대단치 않아도 계속 극복하고 발전하려는 나를 인정해 주면서 언젠가 아빠를 다시 만나면 아빠가 못 다 주고 갔던 사랑, 내가 많이 줬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