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는 말이 있다. 허무맹랑한 소리라는 뜻이겠지만, 우리 집 강아지가 직접 풀 뜯어먹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어떨까. '아, 개 풀 뜯어먹는 소리기 실제로 있군' 하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 집 마당이나 산책하는 공원에는 풀들이 많아서, 가끔 뿌꾸가 풀을 질겅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종종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개가 풀을 먹고 게워냈는데 기운까지 없어보인다면 걱정되기 시작한다.
지난 초여름, 뿌꾸가 초록색 풀을 게워내고 설사를 한 날, 엄마는 너무 놀라서 동네 동물 병원에 뿌꾸를 데리고 가셨다고 한다. 병원 선생님이 개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구토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장염인 것 같으니 약을 지어주셨다고. 그런데 병원 다녀온 다음날까지도 뿌꾸가 묘하게 기운이 없고 엄마를 봐도 별로 반가워할 힘이 없는 듯해서 엄마는 회사에서 일하고 계시던 아빠까지 불러서, 전에 중성화수술을 했던 시내의 큰 병원으로 뿌꾸를 데리고 가셨다. 본의 아니게 이틀 연속으로 동물 병원 행차를 하게 된 뿌꾸는 말 그대로 지리셨다고.. 동물 병원에서 강아지들이 지리는 경우는 많으니 선생님은 괜찮다고 하시지만, 견주 입장에서는 그렇게 가시방석일 때가 없다. 괜히 치워도 냄새나는 것 같고.. 동시에 우리 강아지,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랬을꼬 하면서 불쌍하기도 하고.
부모님은 뿌꾸가 병원 다녀와서 약 먹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애가 자꾸 집 밖에 안 나오려고 하고 이틀 연속으로 설사를 하고(뿌꾸는 지금껏 배탈 난 적이 거의 없다), 낯선 사람이나 고양이가 집 근처로만 와도 목청 좋게 짖는 애가 축 쳐져서 짖지도 않아서 걱정돼서 뿌꾸 중성화 수술을 했던 큰 병원으로 오셨다고. 전에 몇 번 와서 식겁한 적 있는 병원이라는 걸 눈치챈 뿌꾸가 엘리베이터에서 안 내리려고 궁둥이를 엘리베이터 바닥에 붙인 채 버텨서 들고 옮기느라 고생 꽤나 하셨단다. 우리 뿌꾸, 평소에는 맹해 보이는데, 이런 데서는 눈치가 백 단이다. 애가 이틀 정도 아플 수도 있지 약도 지어왔으면서 완전 자녀 과잉보호하는 극성 학부모 아니냐 싶다가도, 엄마아빠가 보내주신 사진 속 뿌꾸가 너무 울상을 짓고 있어서 역시 확인 차 검사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검사와 복부 초음파를 했다고 한다. 결과는 약한 장염. 주사도 두 대나 맞았다고. 왜 날 여기까지 데려와서 이 고생을 시키냐는 뿌꾸의 억울한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엄마아빠는 동물병원에서 소화가 잘되는 습식 사료와 영양식을 사 오셨다고 한다. 피 검사 하고 나서 목에 깔때기를 낀 뿌꾸는 약간 우주비행견 같다. 그 와중에 입을 헤 벌렸는데 아랫니가 너무 작고 하찮다. 고생한 뿌꾸를 보며 웃으면 안 되는데.. 아니 얘는 왜 병원에서도 귀여워가지고.
약도 받았고, 속이 안 좋으니 습식 사료와 물에 불린 황태 큐브를 먹으라고 줬는데 입맛이 영 없는지 잘 안 먹는단다. 그렇게 잘 먹던 애가 밥을 깨작거리니 엄마아빠가 받으신 충격은 어마어마. 마당에 좀 뒀다가 산책을 갔다가 아주 애를 어르고 달리시느라 애쓰셨다. 그로부터 이어진 뿌꾸 집중 관찰 기간... 3일째 아침에 뿌꾸가 쉬하면서 방귀도 뀌었다는, (뿌꾸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tmi까지 알려주셨다. 곧 기력을 회복하고 평소처럼 마당을 뛰어다니는 에너지 넘치는 뿌꾸로 돌아왔다. 뿌꾸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안 되는데. 아프지 말았으면 한다.
개가 나이가 들면 좀 차분해진다던데 우리 뿌꾸는 나날이 힘이 세지는 것 같다. 우리 뿌꾸는 평소에도 종종 땅을 파곤 했는데, 아빠로부터 최근 들어 좀 심각하게 땅 파기를 즐기는 것 같다는 제보가 왔다. 특히 자기 집 마당의 화분 밑과 발판 아래쪽 땅을 집중적으로 판다고. 코로 파고 발로도 파고. 땅 아래 뭐가 있나 싶어서 아빠가 뒤적거려 봤는데 뭘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관심받고 싶어 하는 행동이라기엔 특정 부위만 집요하게 파서, 그 아래 두더지나 쥐 같은 게 있는 게 아니겠냐는 추측만 할 뿐. 그렇다면 뭔가 이해가 된다. 가뜩이나 후각이 예민한 강아지고, 뿌꾸는 영역에 예민한데 내 땅에 침입자가 있으면 짜증이 날 만도 하지.
적당히 땅 파는 건 강이지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다고 해서 놔뒀더니, 겨우내 찍은 뿌꾸 사진을 보면 콧잔등에 진흙이 늘 묻어있다. 발톱도 평소보다 더 잘 닳고. 축축한 뿌꾸 까만 코가 벗겨지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정도로 뿌꾸는 땅파기에 진심이었다. 심지어 내가 보고 있어도 파파팟 땅을 파고 있다. 언니보다 저 땅 밑에서 나는 냄새가 더 흥미롭다 이거지. 묘하게 느껴지는 패배감에 비장의 무기, 산책 리드줄을 꺼냈더니 귀신같이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면서 신이 난다. 역시 뿌꾸는 산책을 제일 좋아한다.
뿌꾸 집 발판은 나무로 되어있는데 뿌꾸가 입으로 잡아 뜯다가 다칠 것 같아서 걷어내고 임시로 돌을 깔았는데 그래도 아랑곳 않고 더 신나서 땅을 뒤적거린다. 저러다 밤새 땅 파는 거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어서, 뿌꾸를 대피시키고 쥐덫을 설치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수확은 제로. 쥐나 고양이가 싫어한다는 주파수가 나오는 기계를 설치해 봤는데 뿌꾸도 기겁을 해서(아무래도 얘한테도 거슬리는 소리였나 보다), 쥐 잡으려다 뿌꾸 잡겠다 싶어서 걷어냈다. 쥐 끈끈이도 설치해 봤지만 아무것도 걸리지 않고. 이쯤 되니 그냥 재미로 파는 건가 싶기도 하고. 찾아보니 자기 체취를 남기는 행동이라거나, 스트레스 해소 행동이라는 말이 있던데. 산책으로 관심을 분산시켜 주는 게 최선인 듯했다.
그나저나 요즘 우리 뿌꾸는 자존감이 하늘을 찌른다. 뿌꾸는 실외배변을 하는데 주로 공원에서 일을 보고, 그 위를 뒷발로 흙을 파바박 차서 덮는 듯한 행동을 한다. 전에는 가끔 그러더니 요즘은 거의 매일 그런다. 냄새를 숨기려고 그러나 싶었는데, 반대로 자기 냄새를 퍼뜨리기 위해서라고. 산책하면서 영역표시도 자주 하려고 하고. 쉬야 하나 싶어서 옆에서 보면 한 방울 도 안 나오는 것 같은데, 괜히 그럴듯한 행동만 하고. 이 마을에서 그렇게 본인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은가. 뭐, 자존감 높은 건 좋은 거니까. 뒤처리하는 우리 가족이 좀 번거로워질 뿐. 하지만 뿌꾸가 행복하다면야, 언제든 오케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