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타-후쿠오카 여행 1일 차
(2024년 3월 13일 여행)
적당히 쌀쌀한 기온의 이른 아침에 노천 온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초 봄에 온천하러 가야겠다 생각하고 알아본 여행지는 일본 오이타현의 히타. 유후인, 뱃푸가 관광객들에게 유명하긴 하지만, 히타는 조금 더 시골 같고 여유로운 느낌이 있다고 해서, 이번에는 히타의 료칸에서 느긋하게 온천을 하기로 했다.
후쿠오카 공항이나 도심에서 히타로 가는 고속버스를 탈 수 있다. 나는 동선을 효율적으로 하고자, 후쿠오카 공항에서 히타로 갔다가, 후쿠오카 텐진으로 이동하는 계획을 짰다. 일정은 히타 2박, 후쿠오카 2박이다. 오전 비행기를 타고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서 후다닥 짐을 찾았다. 공항에서 나와 무료 셔틀을 타고 '남쪽 국내선' 정류장에서 내리면 지하철 타고 후쿠오카 도심으로 갈 수 있는데, 히타로 가려면 남쪽 국내선 정류장에서 한 정거장 더 가서 '북쪽 국내선' 역에서 내리면 된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버스가 온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면 17번 고속버스 타는 곳이 보이는데 여기서 히타, 쿠마모토 등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버스를 탈 수 있다.
17번 정류장 근처에 버스표 사는 곳이 있다. 들어가서 기계 발권을 하려고 하는데, 직원분이 오셔서 어디 가는지 물어보고 친절하게 발권을 도와주셨다. 후쿠오카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서 그런지, 한국말도 조금 할 줄 아시던데. 열심히 도와주시려고 해서 감사한 마음이 드는 와중에 후쿠오카-히타 버스 요금은 왕복으로 3580엔. 교통비는 정말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왕복권을 사면서 날짜가 둘 다 오늘 날짜로 찍혀있길래, 당일치기 왕복권으로 잘못 샀나 싶어서 물어봤더니, 해당 티켓으로 발권일로부터 10일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표에도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이 종이 티겟을 가지고 버스를 타서 내릴 때 기사분한테 내면 된다.
히타까지 가는 고속버스는 1시간에 한 대 꼴로 있다. 나는 11시 47분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남아서 공항 구경하다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먹었다. 일본에 오면 소프트 아이스를 매번 사 먹는데, 정말이지 유제품 좋아하는 나로서는 최고의 간식... 여기까지 오면서 이심 세팅하고, 짐 찾고, 셔틀 타서 이동하고, 버스표 산다고 정신없다가 버스 기다리며 밖에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비로소 내가 일본 여행을 왔다는 게 체감되기 시작했다. 조금 쌀쌀한 바람이 불긴 했지만, 하늘도 쨍하니 날씨 좋고.
버스는 5분 정도 늦게 왔다. 후쿠오카 공항이 출발점이 아니라서 여기까지 오는데 시내에서 차가 좀 막혔다는 듯. 그래도 평일 낮이라 버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후쿠오카 도시 풍경이 지나고 슬슬 산, 논밭의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머릿속에서 서울의 빡빡했던 도시 필터가 맑고 청량한 시골 필터로 갈아 끼워지는 느낌. 고속버스지만 중간중간 정류장에 멈춰 선다. 일본에서 도시 간 이동은 열차로만 했었는데, 버스를 타보니 또 새로웠다.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에서 메이가 아빠를 기다리던 곳 같은 시골의 작은 정류장에 서기도 하고 인터체인지에 서기도 하고. 히타의 유명한 관광지는 '마메다마치'라는 전통 가옥들이 늘어선 상점가인데, 중간에 마메다마치와 가까운 정류장도 있어서 여기서도 사람들이 많이 내렸다. 하지만 나는 히타 관광안내소에 짐을 맡기고 돌아다닐 거라서 관광안내소 근처인 히타 버스 터미널까지는 가서 하차했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히타 버스 터미널은 작았다. 버스 타는 승강장이 서너 개쯤 있고, 우동 가게가 있고 기념품이나 음료 따위를 파는 상점이 하나. 소박한 시골 터미널, 이런 걸 기대하고 왔기에 기뻤다. 그래도 깔끔한 화장실이며 일본의 상징인 자판기도 몇 대 놓여 있어서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다. 버스 터미널에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히타 역 쪽으로 가는데 역 광장에 나를 반겨주는 '리바이 병장'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히타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온천 료칸이었다. 산 좋고 물 좋은 시골 료칸에서 놀고먹고 뒹굴거리리. 그런데 히타에 대해 찾아보다 알게 된 건데, 히타는 유명한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의 고향이라고 한다. 그러면 진격의 거인을 보고 히타를 여행하면 더 재밌지 않을까 해서, 여행 한 달 전부터 진격의 거인 정주행을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스포츠물 오타쿠이지, 누가 죽는 배틀물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도 봐야지 싶어서 거인과 인간의 대결인가 보다 하며 진격거를 시작했는데, 이거 후반부로 갈수록 민족주의, 이념의 대립, 철학적 고뇌가 세트로 밀려오면서 머리를 감싸 쥐게 되었다. 보고 있으면 괴로운데, 결론이 어떻게 나는가 궁금하기는 해서 달리다 보니 완결까지 불태웠다. 고통스러웠지만, 확실히 재미는 있더라. 생각할 거리도 많아지고. 그렇게 내용을 다 보고 히타 광장에서 만난 리바이 병장의 동상. 오타쿠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거예요.(오타쿠는 작품을 보면 필연적으로 최애를 정하게 되는데, 내가 잡은 최애는 리바이 병장이다)
비단 동상뿐만 아니라 역에는 온통 진격의 거인 투성이었다. 앱을 통해서 거인 AR을 체험할 수 있는 서비스 홍보 패널부터 시작해서, 여기저기 일러스트가 서 있었다. '진격의 히타'라는 테마로. 관광안내소 앞에는 아르민이 서있고, 안내소 안에는 지금은 기간이 끝난 것 같지만 스탬프 투어용 스탬프가 있었으며, 갓챠를 비롯한 진격거 굿즈를 살 수 있었다. 진격거 팬들이 많이 찾아오는 모양인지, 진격거 메인 관광지, AR 스폿 등을 안내한 '진격의 히타 가이드 맵'도 있었다.
히타 역에도 코인로커가 있지만 큰 캐리어 넣기는 사이즈가 애매한 듯해서 관광안내소에 400엔을 내고 맡겼다. 오후 5시 전까지 찾으러 오면 된다고. 여기서 자전거 대여도 할 수 있고 많은 분들이 자전거를 빌려 투어 하는 것 같았는데, 인기가 많은지 평일 오후 2시경이었음에도 더 이상 예약할 수 있는 자전거가 없다고 했다. 내가 관광안내소를 찾은 주요 목적은 짐 맡기기였고 오늘 고즈넉한 감성의 히타를 즐겨보리라 다짐했었지만, 생각보다 본격적인 진격거 굿즈를 보고 나서 오타쿠 모드 발동. 이미 여기서 리바이와 아르민 방향제를 샀고, 500엔짜리 갓챠를 총 네 번이나 돌렸다. 오늘은 히타에서 진격의 거인 흔적을 찾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오전 비행기 타기 전에 이것저것 야무지게 챙겨 먹었지만, 후쿠오카 공항 내리고 나서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먹은 게 전부여서 은근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6시에 료칸에서 가이세키를 먹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진격거 흔적을 찾아 돌아다니기 앞서, 뭔가 적당히 배를 채우고 싶어 근처 카페를 검색하다 들어가게 된 '카페 비요리'. 구글맵으로 찾았는데 파르페로 유명한 곳인 듯 했다.
이런 곳에 카페가 있다고? 하는 생각으로 구글맵이 안내하는 대로 갔는데 진짜 무슨 공터 같은 곳에 건물이 덩그러니 있었다. 약간 의심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생각보다 아늑한 카페였다. 무엇보다 손그림으로 그린 듯한 메뉴판이 정말 귀여웠다! 파르페 종류가 정말 많았는데 고민고민하다 파르페의 정석, 딸기 파르페로 결정. 12월에서 5월 사이에 딸기 메뉴를 파는데, 메뉴명이 한글로도 적혀 있었다. 내주신 물티슈로 손을 슥슥 닦고 기다리니 곧이어 파르페가 등장했다.
이곳은 생크림을 아끼지 않고 쓴다. 그래서 볼륨감이 상당하다. 작년 11월에 신주쿠의 루미네에서 파르페를 먹는데 빈약한 크림 양에 도쿄 인심 짜구만 하고 실망했었는데, 여기는 그런 거 없이 무지막지하게 퍼준다. 물론 파르페는 기본적으로 어느 곳에서나 맛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특출 나게 맛있기도 쉽지 않지만, 생크림에, 과일에, 아이스크림에, 시럽 조합이니 맛없기도 쉽지 않지. 하지만 여기는 귀여운 비주얼에, 넘치는 크림에, 딸기 파르페 콘셉트에 충실하게 딸기 빼빼로를 꽂아주는 섬세함까지 갖추었다. 다른 테이블에는 중년의 부부가 어머님을 모시고 온 것 같았는데, 어머님 생신인 것 같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파르페를 앞에 두고 신나 하시는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사진 찍으면서 행복해하는 중년의 부부, 그리고 그들에게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네는 카페 직원들을 지켜보면서 달콤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때 카페에 있던 모든 이들이 파르페를 더 맛있게 먹었을 것. 입맛도 기력도 달달하게 충전하고 계산을 치르고 나왔다. 참고로 여기는 현금 계산만 가능했다.
찾아보니 Patria Hita라는 공연장에 진격의 거인 카페가 있다고 해서 가보기로 했다. 히타역 근처에 있었는데, 관극이나 콘서트 등을 진행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건물이 크고 깔끔했다. 여기 과연 오타쿠 카페가 있을까? 하고 들어선 순간 눈앞에 진격의 거인 현수막이! 그리고 흘러나오는 진격거 ost. 과연 이곳은 진격의 히타, 진격의 거인이 이 마을의 경제를 이끌고 있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니 메뉴판에서부터 진격거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멋진 점은 각 사업장 별로 콘셉트에 맞는 대사를 하는 주인공 일러스트를 볼 수 있다는 것. 같은 일러스트로 복사해서 돌려 쓰는 게 아니다. 여기서 진격거 작가의 고향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양반, 얼마나 많은 일러스트를 그려서 고향에 바친 거야..
그걸 받은 이 마을의 사람들도, 이걸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는지를 공부한 듯싶었다. 아이돌 생일 카페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진격거 주인공 엘렌, 미카사, 리바이의 인형을 카페 테이블에 앉혀 놓고, 캐릭터 일러스트가 그려진 컵 홀터를 씌운 잔과 진격거 도시락을 올려 두었다. 어떤 오타쿠가 세팅해 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감동했다.
카페의 메뉴는 단출했는데, 나는 이미 달달한 파르페를 먹고 온 탓에 과일향 홍차를 한 잔 주문했다. (리바이 병장이 좋이했던 홍차..) 그리고 리바이 병장 앞에 앉았다. 카페는 한산했고 직원분도 한 분 밖에 없어서 음료는 천천히 나오는 편. 진격거 주인공이 그려진 컵홀더를 씌운 따끈한 홍차를 마시면서 눈앞에 아니꼬운 표정의 리바이 인형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오는데, 마침 진격거 애니메이션의 핵심 주제곡인 '심장을 바쳐라'가 흘러나오고.. 마치 나도 조사병단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한지에게 다 마신 컵을 반납하고, 홀더만 쏙 빼서 가방에 소중히 넣었다.
흥이 올라서 이동한 곳은 '공익재단법인 히타쿠주 지역산업진흥센터'. 이름만 봐서는 무슨 농수산센터인가 싶었지만, 여기서 히타 지역 특산품과 진격의 거인 콜라보 제품을 구경할 수 있다. 과연 건물 입구에서부터 거인 현수막에 거인과 함께 '히타 오리지널 굿즈 판매 중' 문구가. 여기서 정말 많은 진격거 주인공들의 일러스트를 볼 수 있었다. 콜라보 제품도 다양했는데, 우메보시, 라무네, 술, 샴푸/트리트먼트, 전병과자부터 조사병단 마스크, 우드 코스터, 달력, 엽서 등. 히타 특산품인 게다와 지역의 재료로 만든 농산물이나 과자들도 있었다. 관광안내소에서 굿즈를 좀 샀기 때문에 여기서는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게 진격거 우메보시, 전병과 함께 이 지역의 특산 우메보시와 유자 한천을 사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tax refund는 되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을 쫓아 이곳까지 온 오타쿠가 센터를 둘러보다 보니 이 지역의 특산품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지갑을 연다. 센터 내 걸려 있는 진격거 작가의 사인에서 이곳에 '진격의 히타'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그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모로 인풋을 쏟은 작가의 노력이 보였다. 우리도 성공한 게임, 웹툰, 캐릭터 IP를 활용해 지역 활성화 시키면 좋을 것 같은데. 히타와 진격거 관계를 들었을 때는, 뭐 대충 인증샷 찍을 수 있는 안내판 몇 개 세워뒀겠지 싶었는데, 이렇게 마을의 가게와 식당들에 서로 다른 굿즈를 뿌려놓고 이곳들을 모두 성지순례하게끔 만들어 둔 사업모델이라니.
히타에는 유명한 진격의 거인 박물관도 두 곳 있는데 위치가 조금 애매했다. 걸어가긴 멀고 택시를 타고 가야 할 거리. 특히 관심이 갔던 박물관 별관은 삿포로 맥주 공장과 붙어있었다. 사실 나는 4월 초에 가족여행으로 히타에 한 번 더 올 거고, 그땐 삿포로 맥주 공장과 진격거 박물관도 갈 예정이어서 이번에는 들르지 않았다. 근데 생각할수록 박물관 같은 메인 스팟도 중요하겠지만, 마을의 여러 소상공인들이 진격거 캐릭터의 덕을 볼 수 있게 설계한 게 너무나도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이래서 '진격의 히타'구나.
내가 이번에 예약한 료칸은 '하타고 카야 우사기'. 오후 5시에 히타 관광안내소 앞으로 송영 서비스를 예약해 두어서, 히타의 제품들로 제법 묵직해진 가방을 들고서 역 쪽으로 돌아왔다. 역 앞에서 시간 맞춰 와 준 료칸의 차량을 타고서 10분 채 안되게 달려서 료칸에 도착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료칸의 호사스러움을 느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