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 23분.
지하철 2호선에서 내려 왕십리에서 출발하는 22분 팔당행 열차를 잡으러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1분 차이로 놓쳤다고 생각하고 전광판을 봤더니 연착을 했는지 ‘전역 출발’이라는 선명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상봉에서 출발하는 경춘선으로 갈아타기 위한 최단 환승 열차 문이 엘리베이터 앞에 위치해 있어서 나는 에스컬레이터보다는 주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지금은 최소 1분 이상의 여유가 생겼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지하 1층에서 출발해 지상 1층에 도착했다. 몇 년을 다니던 길이라 최단시간과 최단거리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이 시간대에는 탑승줄이 반대편 탑승위치까지 침범한다. 두줄로 서고도 용산 방향 스크린도어까지 늘어선다. 왕십리는 환승구간이라서 출퇴근 시간에는 더욱 붐빈다. 문이 열리고 열차는 사람들을 한 번에 쭈욱 흡입한다. 가끔 사레가 들려 한두 명은 토해내기도 한다. 맨 꼴찌에 섰던 나는 겨우 두발을 차 안으로 욱여넣었다. 다들 경험이 있겠지만 생면부지의 남자와 얼굴을 맞대고 몇 정거장을 같이 갈 생각이 아니라면 몸을 돌려 엉덩이부터 입장해야 한다.
몸을 문에 밀착하고 창문에 비친 내 얼굴과 옆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흘끗거리며 다음 역에 도착했다. 청량리역이라 많은 사람들이 내렸고 나는 안쪽 자리로 이동했다. 다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태블릿을 산 후로는 짧은 구간 이동 시 스마트폰을 잘 보지 않는다. 태블릿에 익숙해져 작은 화면으로는 집중이 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대신 두리번두리번 사람 구경을 한다.
한 젊은 청년의 귀가 눈에 들어왔다.
피어싱.
귓바퀴에 큐빅 2개(설마 다이아몬드는 아니겠지), 귀 윗부분에 피어싱 3개, 총 5개의 구멍이 한쪽 귀에 촘촘히 뚫려 있었다. 반대편 귀는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든 생각이 '저런 걸 징그럽게 왜 했을까?'가 아니라 '많이 아팠겠군'이었다. 귀걸이야 남자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피어싱에 대한 반감도 그다지 없다. 굳이 말하자면 한 몸이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귀걸이나 목걸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귀에 비해서 외모는 매우 평범했다. 검은색 무지 와이셔츠에 라이트 블루 청바지를 입고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머리 스타일도 펌을 하지 않은 얌전한 생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귀만 빼면 그다지 눈에 쉽게 들어오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얼굴을 돌리길래 살짝 봤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어도 여자들에게 인기 많을 날렵한 턱선에 갸름한 얼굴형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는 청년의 옆모습에서 순간 이질적인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눈두덩에 가늘게 살색과는 다른 분홍색이 비쳐 보였다.
아이섀도를 한 눈이다.
요즘 젊은 남자들은 스킨, 로션뿐만 아니라 BB도 기본이라고 한다. 나도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기 때문에 토너, 에멀전, 향수 등을 사용하고 있다. 회사에 젊은 친구들이 많아서 나름 트렌드를 이해하고 쫓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문신도 하고 싶고 목걸이, 귀걸이에는 아주 관대하다. 하지만 남자가 하는 메이크업은 아직은 낯설다. 되려 피어싱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메이크업은 여전히 여자들의 전유물이라는 꼰대(?)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TV에 나오는 남자 아이돌들도 대부분 메이크업을 하고 나온다. 또 그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연예인이니까 당연히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아직 내 주위 사람들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했나 보다.
패션 산업에서는 이미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 오래고, 미의 기준에 있어서도 남성미와 여성미에 대한 기준이 모호한 젠더리스 시대다. 아름다워 보인다면 굳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낯선 광경에 대한 거부감마저 사라지지는 않는다. 여성 원피스나 요즘 대세인 레깅스가 아무리 이쁘다고 해도 매일 남자가 입고 다닌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미는 현실의 파괴로부터 시작된다. 조금 더 다르게 보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시도가 지금 시대의 트렌드로 하나씩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당연히 낯설고 부자연스러워야 남들과는 달라 보이고 차별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라면 이런 부자연스러움을 '무관심'의 영역으로 밀어내 버리겠지만 인생의 반을 넘어선 나이라면 '남의 일'도 '나의 일'처럼 여기게 된다. 본인이 살아온 인생이 정답이었다는 확신을 남들의 시선과 동조로 재확인받고 싶어 한다. '어떻게 저러고 다닐 수 있지?'라는 말에는 '난 저러고 다니지 않았는데'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다른 남은 '미쳤네'라는 용어로 살뜰히 포장해 버리는 내공이 쌓여가고 있다.
이쁘고 아름다움에 '美친성애자'라도 50이라는 나이가 낯선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은 부족한가 보다.
문득 초등학교 때 유행한 ‘카멜레온’을 부른 컬처클럽의 보이조지가 생각난다. 맞아. 그때도 있었지.
- 미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