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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ho Jul 26. 2022

쓰지 못하는 마음

쓰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날들





   “엄마는 꿈이 뭐야?”

   아이는 잊을 만하면 나에게 묻는다. 작년까지 내 대답은 ‘작가’였다. 엄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러면 아이는 작고 동글한 얼굴을 끄덕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아, 그렇구나 한다. 

   아이의 꿈은 매번 달랐다. 어느 날은 수의사였다가 또 어느 날은 소방관이었다가, 피아니스트가 되기도 하고 선생님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은 주스 가게 사장님이 되고 싶단다. 반면 내 꿈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늘 똑같았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아이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리게 된다. 


   글쎄, 엄마는 뭐가 되면 좋을까.


   내가 머뭇대는 사이, 아이가 엄마 꿈은 작가잖아 말을 꺼낼까 봐 겁이 난다. 

   언젠가 아이가 글쓰기를 제법 멋지게 해낸 적이 있었다. 그때 칭찬이랍시고 와, 나중에 작가가 되도 되겠는데? 라고 말했더니 아이가 이렇게 대꾸했다.

   “그럼 내가 엄마 대신 작가가 될까?”

   나는 당혹스러웠다. 내 꿈은 온전히 내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아이가 내 꿈을 이뤄주길 바란 적이 없다. 아이가 주스 가게 사장이 되고 싶다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중하게 메뉴판을 생각하고 어떤 과일을 사용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매일 과일 껍질을 벗기고 자르는 일이 얼마나 힘들지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의 꿈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니까.

   분명 아이는 나를 위해 한 말일 것이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가 작가가 되고 싶다면 해도 좋지만, 엄마를 위해 되어줄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왜 당당하게 꿈을 말하지 못하게 됐을까. 나는 언제까지 꿈꿀 수 있을까. 스스로 자책하게 된다. 그럴 때 손바닥에 닿은 아이의 따뜻한 체온만이 나를 위로해주는 듯하다.   

  

   매일 아침 아이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등교 준비를 돕는다.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친구인데도 늘 신경 쓸 일이 많다. 옷을 거꾸로 입진 않았는지 수저통과 물은 뚜껑이 잘 닫혔는지 핸드폰으로 오늘 아침과 한낮 기온을 확인하며 외투를 입힐지 말지 고민한다. 등굣길을 배웅한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지난밤에 읽다 만 소설책을 펼친다. 매번 다른 내용인데도 전부 내 이야기 같아서 자주 울컥한다. 읽던 소설이 재미있으면 혼자 울며 웃으며 한참 시간을 보내다가 뒤늦게 어질러진 집안을 정돈한다. 깨끗해진 거실과 그 너머 창밖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별 일하지 않았는데도 온몸에 힘이 쑥 빠져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     


   하지만 사실 마음은 내내 어지럽다. 아직 쓰다 만 소설이 늘 빚처럼 목구멍에 걸려있다.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언제나 글 속에서 길을 잃는다. 왔던 길을 더듬어 돌아가 제대로 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말이 쉽지, 무척 어렵다. 아주 재미있고 정말 어렵다. 겁을 먹고 시작을 주저하다 보면 어느덧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다. 

   나는 고요하게 흐르는 날들 속에서 내가 만든 가상의 인물들에게 얼마간 빚을 진 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누군가와 만나야 할 약속이 있다고, 오늘은 정말 몸이 좋지 않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자신에게 핑계를 댄다. 이런 상태로 산 시간이 늘어난 만큼 꿈이라는 단어를 내뱉기가 점점 더 부끄러워졌다. 서른일곱 해나 살았는데 여전히 겁나는 것도, 부끄러운 것도 참 많다. 

   결국, 오늘도 소설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쓰고 싶다. 바보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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