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시작할 때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고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싶고
충분히 연습한 후에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고
그래서
역시 나중에 하는 게 좋겠어
아직은 연습이 부족해
다음 기회를 노리는 사람이 바로 나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
다들 그러는 것 같아 안심이 되기는 개뿔
정신 차려야 한다.
나에겐 이런 생각이 들 때 떠올리고
마음을 독하게 먹게 하는 이정표가 있다.
예전에 이벤트 회사 MC 알바를 했었다.
한 달 연습하고 실전에 투입됐는데
무대에 오르기 전 실장님께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습을 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얘기했더니 '실전이 가장 좋은 연습이다'라며
무대에 등 떠밀려 올라갔었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났다.
조금은 익숙해진 무대, 익숙함에 잠깐 방심했나 보다.
무대 소품에 손가락이 베였다.
조금만 더 진행하면 행사가 마무리되는 타이밍이라
대충 손가락에 휴지를 감고 강행했다.
그런데 피가 많이, 생각보다 아주 많이 났다.
휴지가 빈틈없이 빨갛게 변해버렸다.
어쩐지 하객들 표정이 뭔가 걱정하는 눈빛이 더라니.
망했다는 생각에 빠르게 인사드리고 나왔다.
그대로 집에 가려고 했는데, 갔어야 했는데.
피가 계속 나서 홀 직원에게 부탁해 응급처치를 받았다.
그렇게 조금 늦게 나오는 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
펑펑 울고 있는 아이 어머니를 봤다.
부모 입장에서는 평생에 한 번 있는
아이의 돌잔치를 망친 거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이렇게 부담되고 무거운 일이었음을
알게 된 계기였다.
그날 실장님께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행사를 진행했으면 좋겠다'
말씀드리고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러자 실장님께선
'충분히 잘하기 때문에 무대에 올렸다. 우리 소속 MC들 실력 좋은 편이다. 그런데 네가 하지 않으면 너보다 못하는 사람이 행사를 하게 된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하셨고 나는 '죄송합니다'하고 나왔다.
그날의 선택으로 나는
1. 말을 잘하고 싶다는 욕망을 저버렸고
2. 말을 연습하며 돈도 벌 수 있는 무대를 잃었으며
3. 중압감을 견디고 넘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를 잃었고
4. 나보다 못한 이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주고
5. 나보다 못한 이들이 나보다 나아지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무대에 오르면 무대에 걸맞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어떤 사람도 남들에게 못나 보이고 싶지는 않은 법이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 연습하는 것과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어서 정말 잘하고 싶다면
일단 무대에 올라서 못난 모습이라도 보여야 한다.
실전이 가장 좋은 연습이다.
부족함을 느끼려면 무대에 서 봐야 한다.
무대 아래에서 하는 생각은 어찌 됐건 망상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브런치에 쓰는 이유는
브런치가 무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기 같은 글을 써봐야 누가 보겠어?
그냥 구글 문서에 쓰면 되잖아?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에 쓰면 정말 막 쓰게 된다.
누가 본다는 생각을 하니까 조금이라도 신경 쓰고
꼭 필요한 이야기인가 되돌아보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당장 시작해야 하는 이유를 또 하나 생각하자면
요즘은 브런치 작가 되는데 무슨 조건이 있다고 들었다.
그 조건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예전에는 그런 거 없었다.
빨리하면 대부분의 상황에서 좋다.
무조건 좋다고 하고 싶은데 군대 생각이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