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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모 Aug 03. 2017

시간을 쓰는 방법

외로움으로 여행하기 #5


이른 아침의 냄새가 묻어 있는 희뿌연 플랫폼에 도착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약속된 열차에 올랐다. 무궁화호의 익숙한 그 냄새. 잊고 있던 오랜 여행의 감각들이 단번에 되살아났다. 순서 없이 뒤죽박죽으로 깨어나는 옛 추억이 반가웠지만, 시선은 무심히 차창 밖에 두었다. 출발과 함께 조금씩 뒤로 밀려나는 일상의 풍경들. 내게 여행이라는 두 글자와 가장 친숙한 공간은 언제나 기차역이었다.



여러 가지 교통수단이 있지만, 여행의 정취가 있으면서도 유난히 친숙한 것은 대구에 있던 학교와 울산의 집을 연결해주던 무궁화호 기차였다. 지금은 동해선으로 편입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당시 ‘동해남부선’으로 일컬어지던 그 구간은 길이가 4량 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무궁화호가 다녔었다. 2-3개월에 한 번 그 철길 위를 달리며, 기차라는 공간에 점차 익숙해졌었다


기차 여행은 장거리 이동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림을 완성할 시간이 넉넉히 주어졌고, 무엇보다 타 교통수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락한 탑승감 때문에 그릴 때의 부담감이 덜했다. 그래서인지 지난 여행 기록을 들춰보면 유독 기차에서 남긴 그림들이 많다. 지금도 이동 중에 남기는 그림의 절반 이상은 기차 안의 풍경들이다.



기념하고픈 여행의 순간이 참 많지만, 그 중에서도 심장은 여행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가장 힘차게 쿵쾅거리곤 했다. 설레는 여행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공간. 그곳은 바로 공항이다.



여행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공항이 가지는 의미가 작지 않지만, 여행 후 돌아본 기록 속에서 공항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서둘러 탑승 수속을 밟고, 무거운 짐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기내에 탑승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때때로 공항에서 주어지는 느슨한 시간은 그래서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비행기가 지연되거나, 환승을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면, 무료하게 버텨내야 하는 그 순간을 그림으로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 카메라가 아닌 내 손 끝으로 기록할 때, 공항은 우리 여행 속에서 더욱 의미 있는 공간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 같다.


배에서는 멀미를 안하는 사람만 그려볼 것..!



차량 안에서 그린 여러 드로잉들


여행 속에서 우리는 이동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버스와 차량, 기차, 비행기 등의 소규모 공간은 기념할 만한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의미부여가 잘 되지 않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동 중에 흘러가는 시간은 전체 여정 중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의미 없이 낭비되기 가장 쉬운 순간들이기도 하다.

버스를 기다리며 그려본 제주 동복리 풍경
기차 안에서 그린 나의 왼 손 / 내 손은 때로 훌륭한 연습 소재가 되어준다


여행 후 이동하며 남긴 자잘한 기록들을 들춰보았다. 습관처럼 남겨놓은 보잘것없는 기록들로 인해 여행의 추억이 더욱 풍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낭비되는 나의 시간들을 그림으로 붙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 남들과 같은 시간 속에 있지만, 그 누구보다 밀도 높은 여행을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2009년과 2016년의 드로잉



나는 여행을 기록하기 위해 시간을 쓴다.

하얀 종이 위에 흘러가는 시간을 쓴다.


From. 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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