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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모 Jul 17. 2016

홍콩 그리고 스타페리

외로움으로 여행하기 #4

희뿌연 홍콩의 아침


평소엔 떠지지 않던 게으른 눈꺼풀은 여행의 공간에서는 유난히 부지런해진다. 조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홍콩의 명물인 스타 페리(Star Ferry)에 탑승하기 위해서였다.

4월임에도 습도 높은 아침 공기가 이곳이 서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소금 냄새가 나는 바람을 느끼며 스타 페리가 정박하는 선착장을 향해 걸어갔다.


스타 페리와 홍콩섬의 마천루


스타 페리는 홍콩 섬과 카오룽(Kowloon) 반도 사이를 연결해 주고 있다. 1888년 운항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한 세기를 넘는 시간 동안 서민들과 여행자들의 주요한 교통수단이 되어주었다. 세월이 흘러 이것이 더 이상 카오룽 반도에서 홍콩섬으로 가는 가장 빠른 수단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홍콩을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스타페리를 타는 것은 단순한 교통수단 그 이상의 체험적 의미가 있다.



아침 9시 반. 출퇴근 인파가 몰리지 않는 시간이어서 넓은 객실에 승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알아듣지 못할 방송이 몇 차례 나온 뒤 서서히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다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창문 없는 선내를 한 바퀴 훑고 지나갔다. 조금 습하지만 기온이 높지 않은 덕분에 상쾌하게 느껴졌다.



페리의 움직임에 따라 주위의 풍경도 서서히 변해갔다.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라면 페리 보다는 택시나 홍콩의 지하철 MTR이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선착장에서 페리를 기다리고 갈아타는 시간이 낭비라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의 속도를 선택한 대가는 카우롱 반도와 홍콩섬을 잇는 캄캄하고 음울한 해저터널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가슴 설레는 바다의 냄새가 좋고, 아침 이슬과 저녁 안개에 젖어있는 홍콩 섬과 침사추이의 전경을 조용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은 사람은 스타 페리를 타야만 하는 사람이다. 막상 탑승해 보면 페리의 속도가 그리 느린 것도 아니어서 멀어 보이던 홍콩섬의 해안선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좀 더 빨리 가기 위해 기꺼이 어두운 터널을 선택하기에는 바다 위에 펼쳐진 홍콩의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페리에서 내려 홍콩섬에 첫 발을 내딛었다. 불현듯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 나는 어쩌면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달려가기 위해 그동안 캄캄한 해저터널을 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확한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머리 위에 눈부신 바다가 펼쳐져 있다는 것도 모른 채.


Star Ferry, 2013


하나의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고작 며칠간의 여정을 통해 묵혀두었던 고민들을 모두 털어낸다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휴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홍콩 여행에서 보낸 시간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았다.


일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나와의 대화를 할 수 있는 여행을 앞으로 더 잘할 수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작지만, 그것은 큰 변화였다.


- 매거진 '외로움으로 여행하기'는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의 프리퀄(Preque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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