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or Liber_책을 사랑하는 시간, 공간, 인간
소설가 스티븐 킹(Stephen King)은 음주 집필에 대해 ‘계속 술을 마시는 작가’는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세심하게 술을 마시는 작가’는 더 나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조언은 독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길 위에서>의 작가 잭 케루악(Jack Kerouac)은 취하려고 마시지 말고 즐기기 위해 마시라고 충고했다. 우리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지 말고 독서를 즐기기 위해 마셔야 한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좋은 책과 좋은 술이 함께 하면 독특하면서도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음주 독서를 나는 ‘주책(酒冊)’이라 부른다. 몇 년 전부터 가끔 주책을 벌이고 있다. 언젠가 서재에 소박한 책바(冊Bar)를 꾸미는 게 나의 로망이다. 주책은 외부 활동이 많지 않은 나의 낭망적 일상이다. 지인들에게도 가끔은 주책 부리기를 권한다.
술과 책을 같이 즐기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단순한 방법이 있다. 마음을 최대한 풀고 책도 느슨하게 읽는다. 처음 보는 책보다는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읽는다. 처음 보는 책이 끌리면 마다하지 않지만 이때도 완독하거나 정독하지 않고 발췌독(拔萃讀), 즉 마음 가는 대로 펼쳐 읽는다.
내 책상에는 읽고 있는 책이나 읽어야 할 책이 늘 놓여 있다. 그런데 책상 위 책이 아닌 어떤 책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대부분은 언젠가 읽어야지 하며 사둔 책이다. 그 ‘언젠가’가 ‘불현듯’인 셈인데, 딱히 그 책이 떠오를 이유가 없고 읽어야 할 목적도 없다는 점에서 우연한 일이다. 나는 그 책을 찾아서 술 한잔하며 발췌독한다.
한번은 그렇게 손에 잡게 된 책이 이윤기의 첫 산문집 <무지개와 프리즘>이다. 1998년 초판이 나오고 2007년에 세 번째 개정판이 나왔다. 이 책의 ‘여는 글’ 제목을 보고 미소 지었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당시만 해도 나름의 독서 계획을 세우며 읽고 있었기에 <무지개와 프리즘>은 어찌 보면 ‘잘못 든’ 책이었다. 그런데 그런 책에서 뭔가 가치 있는 걸 건지곤 한다. 문득 마음에 떠오른 책을 무시하지 않는 이유다. <무지개와 프리즘>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는 글’에 이어 책의 1장 제목도 내 가슴을 쳤다.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 인물 탐험을 즐기는 내가 혹할 수밖에 없을 주제 아닌가! 술을 홀짝이며 읽은 <무지개와 프리즘>에서 밑줄 친 구절을 몇 개 옮겨본다.
지금 삶에서 무엇을 취하고 있는가? 하고 있는 일은, 살고 있는 삶에는 지금 내 피가 통하고 있는가? 나는 하고 있는 일의 품삯이 아닌, 일 그 자체, 그 일의 골수와 희로애락을 함께할 수 있는가? 나는 삶에서 무엇을 취하는가, 가죽인가, 뼈인가, 문제는 골수이겠는데, 과연 골수인가?
(영웅신화에 등장하는) 이 괴물은 구경꾼으로 만족하는 사람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괴물의 힘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자의 정신의 용적에 비례한다. 괴물을 죽인다는 것, 곧 어둠을 몰아낸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변용시킨다는 뜻이다.
책은 인생의 지도다.
책에 쓰여진 글이 지극한 진리가 아니듯이 프리즘이 만들어내는 무지개는 진짜 무지개가 아니다. 하지만 책은 작은 무지개를 지어내는 작은 프리즘이다. 나는 프리즘을 깨뜨리고 싶지 않다. 프리즘이 발명된 뒤로도 무지개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의 말처럼 ‘책이 인생의 지도’일까? 내 경험을 돌아보면 드물긴 해도 그런 책이 있다. 지도가 영토는 아니기에 지도의 역할은 제한적이지만, 좋은 책은 메두사(Medusa)와 대결하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우스(Perseus)에게 헤르메스(Hermes)가 준 날개 달린 가죽 신발처럼 결정적 도움을 주기도 한다. 준비된 사람의 손에 쥐어진 좋은 책은 크레타 왕국의 지하 미궁에 살고 있는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와 싸우기 위해 미궁에 들어가야 하는 테세우스(Theseus)의 손에 아리아드네(Ariadne)가 쥐여준 실꾸리 역할을 한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문장을 다시 들여다본다.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일리 있는 말이다. “책은 인생의 지도”라는 말도 다시 살펴본다. 내게는 두 문장이 엉뚱하게 연결된다. 아마 살짝 취했기에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들고, 잘못 든 책에서 지도를 발견할 수 있다.
발췌독은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이기도 하다. 어떤 책을 10분 정도만 발췌독하면 내게 얼마나 맞는지 거의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발췌독으로 시작해 정독으로 이어진다면 필시 좋은 책이다. 발췌독으로 시작한 <무지개와 프리즘>을 나는 이틀만에 다 읽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일독이호색삼음주(一讀二好色三飮酒)’라는 글귀를 남겼다. 직역하면 세상 사는 즐거움의 첫째는 독서이고 둘째는 연애이며 셋째는 술이라는 말이다. 세 가지 즐거움을 만끽하는 방법이 있으니, 좋아하는 책을 술 한잔하며 연애하듯 읽는 것이다. 어떤가? 그대도 한번 해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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