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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유 Sep 25. 2020

그리움과 정면으로 직면해보는 것

https://brunch.co.kr/@herstory7/52


우리는 마치 지나간 과거를 붙잡을 수나 있을 것처럼,

겁도 없이 추억들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2012년부터 2016년까지의 시간으로 돌아간 나는,


여전히 그의 곁에서 그 순간이 영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소소한 일들에도 그렇게 까르르 즐거워했고,

마치 내 세상의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모든 모습을,

우리의 모든 순간들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첫 월급 타던 날, 몇 번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 수줍게 먼저 밥을 사겠다고 이야기했던 나,

아침부터 부산하게 일어나, 잘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한다며 굳이 도시락을 싸서 피크닉을 준비하던 나,

내 고양이의 어린 시절, 함께 아기 고양이를 데려오며 같이 이름을 짓고, 그 자그마한 생명체를 어쩔 줄 몰라하며 소중히 안고 있던 그의 모습,

온 세상을 같이 탐험이라도 하듯, 땅끝마을 저편 작은 섬부터 강원도 끝자락까지, 매달 전국 곳곳을 누비던 우리,

그때는 그 모든 것이 온통 새로웠고, 함께라면 같은 바다, 같은 숲 속, 같은 음식이라도 늘 즐거웠던.. 우리가 있었다.


"이제는 어딜 가도 새롭지 않아. 예전보다 단단해지긴 한 것 같은데, 재미가 없어."


"우리는 그때 너무 많은 곳을 함께 가버린 것 같아. 더 이상 새로운 곳이 없어."


그는 갑자기 옆에 있던 포스트잇을 꺼내어 펜을 들고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1. 파주 모티프원 (매년 12월 31일, 함께 가서 도란도란 새해 플랜을 짰던 게스트하우스)

2. 인제군 곰배령 (처음으로 함께 갔던 여행, 우리는 그 뒤에도 2번 정도 녹색이 우거진 여름 기념일 즈음에 다시 찾곤 했다.)

3. 터키 이스탄불 (여행 통장을 만들어 매달 곗돈을 모아 처음으로 갔던 우리의 해외여행, 모든 순간이 추억 투성이인 곳)

4. 강원도 빨간 방 (속초 여행은 거의 매해 갔었는데, 너무 엔틱 한 나머지 80년대가 떠올랐던 숙소. 낡디 낡은 곳이었는데 그곳이 이렇게 기억에 남을 줄이야)

5. 코타키나발루 (셀프 웨딩을 찍겠다고 삼각대 들고서 둘이 연거푸 찍었던 어색한 사진들.. 선셋이 너무 아름다웠던 곳)

6. 땅끝마을 보길도 (가장 먼 섬으로 가보겠다고 장작 10시간을 운전하고도 또 배를 타고 들어갔던 곳. 그 섬의 까만 밤 쏟아지는 별들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7.

8.

9.

...


포스트잇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란 우리의 추억들.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왜 이러지 오빠. 나 꽤나 오랜 기간 아무렇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나는 알 것 같아."


"왜 그런 거야?"


"그리워서 그래.."


"왜 항상 나만 그리워하고,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거야?"


"...."

그는 온통 슬픈 눈동자를 하고서 나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렇다. 나는 사무치게 그리웠다.

언제라도 안길 수 있었던 그의 넓은 품이, 늘 곁에 있던 그 시절이.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타던 내가 언제라도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

매일같이 만나도, 아무 이야기나 해도, 떡볶이에 그저 캔맥이나 기울여도 늘 즐거웠던 그 시절이,


끝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던,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그 순간들이.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2020년으로 돌아왔고, 휩쓸고 지나간 기억의 잔재 속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지만,

똑같이 출근을 하고, 밥을 먹고, 친구들을 만난다.


예고 없이 자꾸만 눈물이 차오르곤 해서 회사에서 퍽 곤란하기도 하지만,

또 놀랍게도 하루하루 나의 가을로 돌아오고 있다.


나는 4년 전의 이별을 또다시 가져와, 다시 이별하고 있는 내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보다 다른 의미로 더 힘들어하고 있는 나를.. 나는 스스로 납득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글을 썼다.

(혼란스럽고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을 때, 내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글로 뱉어내는 나의 오랜 습관이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기억의 필름을 걷어내고

애타는 그리움만 남겨놓고,

직면하기 두려운 그 마음을 희미하게나마 직면했을 때


내가 이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특별했던 나의 연애보다도,


누굴 만나도 대체가 되지 않던,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 사람보다도,


나의 이십대 청춘이었다.


사랑이면 다 될 줄 알았던 바보같이 순수했던..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던 내 모습이.

누군가가 마냥 너무 좋아서, 하루고 이틀이고 매일 같이만 있고 싶었던 그런 내 마음이.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래서 누군가를 계산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던 내가.


온통 처음이었던 낯선 풍경, 낯선 소리, 낯선 음식, 낯선 공간에 환호했었던 내가.

함께라는 모든 새로운 경험 앞에 늘 설레고 기대할 수 있었던 내가..


그런 내가 그리웠던 것 같다.


나는 사실 알고 있다.


우리의 여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각자의 가을에서 각자의 시간을 살아낼 테고,

또 언젠가 우리의 여름을 추억할 테지만,

2020년의 우리가 혹여 다시 만나 사랑을 하더라도, 2012년의 사랑을 다시 할 수 없음을..


그도 그러할 테지만,

지금의 나 또한 그때의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는 냉정하게 오늘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결코 잡을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마치 지금 그를 다시 만나면 잡을 수나 있을 것처럼,

돌이킬 수 있을 것처럼 애달파하는 내 모습을.


아프지만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영화 인셉션처럼,

덧없는 시간을 꿈에서라도 잡을 놓을 수만 있다면..


아무도 없는 기억의 섬에서 절대 변치 않을 사랑과 끝도 없이 모래성을 쌓을 수만 있다면, 꿈처럼 낭만적이겠지만.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움과 직면하고 그 시간을 보내줄 줄 아는 것.

Let it flow.


그리고 그때 그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충분히.. 다독여주는 것


그렇게 나는 조금씩 다시.. 나의 가을로 돌아오고 있다.


안녕, 우리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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