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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白露) 수제비

by 봉진

2025년 9월 7일(일)

최저온도 23°/ 최고온도 30 / 강수량 57mm


백로(白露) 아침 날이 흐렸다.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잔 짝꿍은 피곤함에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한가로운 일요일을 보낼 테야 라는 굳은 마음을 먹은 채 아이패드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짝꿍에게 늘 내 잠을 나눠주고 싶은데, 나는 너무 자고 짝꿍은 잠을 너무 못 자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러던 중 잠결에 짝꿍은 이장님 전화를 받았다.

"수제비나 먹으러 가게"

이장님 내외와 이 마을에 5도 2촌 하신 이장님 누님(우리는 고모님이라 부른다.) 내외 두 분과 종종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여름 동안 서로 바쁘기도 하고 덥기도 해서인지 오랜만에 밥이나 한 끼 하자는 전화였다. 잠을 못 잔 짝꿍을 더 자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장님 제안이 반가워 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도착한 식당은 섬진강변에 위치한 민물고기 전문점으로 참게탕, 민물고기 매운탕, 다슬기 수제비 메뉴로 꽤 알려진 곳이었다. 수제비를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비 오는 날 수제비라니- 참 소박한 음식인데, 집에서 내가 직접 해 먹으려면 귀찮은 일이 되고 누가 해주는 수제비를 먹는 건 언제나 꿀맛이다.


6인분의 수제비가 둥글고 넓적한 큰 그릇에 담겨 나왔다. 내가 먹은 그동안의 수제비는 1인분씩 그릇에 담긴 소박한 음식이었는데 우리 식탁에 내온 수제비는 대야만 한 크기 그릇에 담긴 넘실대는 화려한 수제비였다. 각자의 그릇에 수제비를 덜어먹으며 소박한 이야기로 상을 채웠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 각자의 텃밭 이야기인데, 우리 집을 제외하고 모두들 김장 준비로 텃밭 준비를 하시고 계셨다. 배추 모종도 심으시고, 무 씨앗도 뿌리고, 쪽파까지.

우리는 배추 심기는 포기했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몇 포기라도 심고 싶기도 했다. 봄에 심은 대파가 아직 텃밭에 잘 자라고 있기는 한데 잡초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하니 다들 크게 웃으셨다.


IMG_6925.JPG 다슬기 수제비


공기가 제법 시원해지니 '지난여름'을 떠올려 본다. 야외활동을 주로 해야 하는 시골에서 극심한 더위를 극복하는 날들이 있었지만, 제법 시원해진 밤공기에 벌써 '지난여름'이 돼버렸다. 이렇게 쉽게 잊힐 날들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여름 내내 교류가 뜸했던 이웃들과 한가득 식사를 하고 나니, 왠지 가을을 시작하는 식사가 된 것 같았다. 가을이 주는 풍성하고 풍요로운 넉넉한 기분들.


이사 올 때부터 심겨 있던 부추에 꽃이 피었다. 사는 동안 부추는 원 없이 먹고, 이웃들과도 나눠 먹을 정도로 늘 알아서 채워주었던 작물이다. 부추꽃은 좀 더 보고 싶어 베지 않고 있다.

가을이 시작되는 풍경의 변화도 세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놓치고 말 텐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들여다보아야 할까.


IMG_6974.JPG 부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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