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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의 배신

by 봉진


2025년 8월 23일(토)

최저온도 22°/ 최고온도 34°



무더위가 가시고 가을이 온다는 처서(處暑)

'처서의 배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푹푹 찌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가을의 선선함을 기다렸으면 그 간절한 마음에 배신이라는 감정을 표현했을까.


늦은 오후 짝꿍은 예초기를 돌리고 나는 낫을 들고 긴 풀을 베었다.

해가 좀 더 지면 시작할걸 그랬지만, 작업량이 많아 조금 이르게 시작했더니 금세 온몸은 땀으로 젖고, 더위 먹은 사람 마냥 어질어질했다. 더위와 땀에 젖은 채로 잠깐 쉬면서 처서의 배신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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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의 배신이 무색하게 마을 풍경은 조용히 처서를 맞이하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벼 이삭이 자랐을까. 알알이 촘촘하게 자란 벼 이삭들을 보니 노랗게 익어 기울인 논 풍경이 아른거렸다. 각 필지마다 땅 주인이 달라 벼 이삭 주인도 다른데, 누구네 집 벼는 알이 더 꽉 찬 것 같고, 누구네 집 벼는 알은 아직 좀 덜 여물었네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모내기할 때도 시기가 조금씩 달랐으니 벼들 생장 속도도 그 시기에 맞춰 조금씩 다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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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나고 나서부터였나. 해 질 녘 넘어가는 하늘과 노을을 자주 올려다보게 되었는데 나처럼

하늘 구경하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해가 넘어가는 그 시간, 더위도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 때쯤 할머니 두 분은 해 넘어가는 산을 바라보고 계셨다. 몇 번 마주칠 적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데 할머니들은 같은 시간에 마을 중간부터 보행 보조기를 끌고 나오셔서 널따랗게 펼쳐진 논밭에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보신다.

두 분이 나란히 걷는 모습도 보기 좋고, 매일 같은 시간에 나와 자연의 시간을 느끼는 감수성과 느긋함이 보기 좋았다. 두 분이 함께라는 장면이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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