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ngsue Kim Aug 27. 2018

내 인생의 변곡점

형님이 소천되었다

나의 삶에서 가장 큰 '변곡점' 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아무런 생각이 안 날 수도 있다. 또는 무언가 잃어버린 일을 떠오를 거라 생각한다. 나도 그 일 이전엔 세상에 힘든 일이 무엇인지 몰랐다.


2015년 3월 형님이 현재 내 나이인 41살에 돌아가셨다. 심근경색이라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41살에 걸맞지 않은 병이다. 자기 관리를 하지 않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먼저 하늘로 데리고 가신 건 정말 야속하다. 가족 부양을 위해 더 힘든 일을 도모하다가 하늘로 돌아가셨다.

자주 보게 되는 드라마 속 병원 수술 장면은 더 이상 고통 없이 볼 수 없다. 나의 고통은 이 정도이다.

하늘을 보면 형님이 생각난다.

부모님의 고통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장남이어서도 아니고 평소 장대한 신체와 우렁찬 목소리 때문도 아닐 것이다. 조금 거칠지만 틈틈이 가족을 생각했던 든든한 맏이의 죽음 때문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울컥해서 그만두려다가 지금 아니면 형님을 언제 떠오를지 몰라서 적어본다. 나의 경우는 1년째까지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아 그 자리에 없구나' 였다가. 2년째부터는 문득문득 울컥함이 찾아왔다. 밥 먹다가 떠오르면 울컥한다. 영화 속에서 고흐가 테오를 생각하는 부분에서 다시 울컥해왔다. 벌써 첫째 조카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그 아이들 앞에서는 울컥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남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계속 생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매년 내 생일 다음 주가 기일이다. 실컷 웃는 날이었다가 다시 우는 날이 돌아온다. 그렇게 매년 기억할 것이다. 그냥 기억 속에서 없어지지 않게 말이다. 성년이 되어서 같이 찍은 사진이 없다. 누가 예상이라 했을까. 병상에 있다가 하늘로 가지 않고 갑자기 쓰러졌다. 눈 한번 못 맞추고 사진 한 장 안 남기고 그렇게 간 사람을 매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기록할 것이다. 


화장터 앞에서 잡았단 유골함의 뜨거움은 잊었다.

살아 있을때 꽃선물 한번 못해보았다.

벌써 3년이 지났다. 벌써 화장터 앞에서 잡았단 유골함의 뜨거움은 잊었다. 형님의 몫까지 잘 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말은 그럴듯하게 다짐은 하는데 쉽지 않다. 살아 있었으면 힘들 때 술 한잔하자고 할 수 있는데 이제 그럴 수 없다. 그냥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날 지켜보고 있을 테니깐. 형님 아주 나중에 만나요. 나는 천천히 갈 테야. 이렇게 적고 나니 보고 싶어 눈물이 난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곡점은 형님의 소천이다. 흔히들 말하는 '욜로' 까지는 아니지만 형님 덕분에 세상 참 덧없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즐겁지 않아도 꼭꼭 눌러서 더 오래 살아갈 예정이다. 남은 가족에 누가 되지 않게 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