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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메스 May 30. 2018

아마추어에겐 현대미술이 오히려 더 쉽다(2_11/11)

위작, 예술성으로 판가름하다, 미인도, 빨래터

[위작]

위작에 대한 이야기를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로 시작하게 되어서 무척 유감이다.

화가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데 감정단이 진품이라고 우기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인도는 천경자의 ‘장미와 여인’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림을 조금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작품이 가짜라는 걸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모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천경자는 자신의 수호신이 될 여인상에 집착하고 있었는데 ‘미인도’는 약간 슬픈 표정을 하고 있어서 자신이 보호해야 할 여인으로 그녀를 그릴 리가 전혀 없다. 수호신이라면 무당의 무신도처럼 당당한 표정에 쏘아보는 듯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해야 한다. 천경자 작품의 특징은 눈이 살아 있는데 ‘미인도’의 눈은 썩은 명태 눈처럼 힘이 없다는 것을 문외한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권력자에게 ‘미인도’를 선물했다던데 차마 가짜를 선물했다고 말할 수 없었을 테지만 그 권력자가 죽고 없는 마당에 진실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동양화가 권모씨는 자신이 ‘미인도’를 그렸다고 주장했는데 아마 이 고백이 맞을 것이다. 개인적인 불명예를 감당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제목을 ‘미인도’로 정한 것도 지극히 동양적이다.

천경자라면 제목을 ‘장미와 여인’처럼 ‘화관을 쓴 여인’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동양화가가 서양화를 그릴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서양화가는 특유의 붓놀림 버릇이 있을 수 있고 화풍 때문에 모방을 못할 수 있다. 동양화가는 그런 버릇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천경자의 화풍을 충실하게 모방할 수 있다.

권모씨의 중언까지 무시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감정한 작품에 대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보인다. ‘미인도’가 전반적으로 자신감이 없는 필치로 보인다든지 천경자가 평소 안 쓰는 색상을 조합한다든지, 얼굴에 그늘진 표정을 짓는다든지, 눈이 죽어있다든지, 무엇 보다 작가가 자신이 그린 적이 없는 작품이라고 하니 ‘미인도’는 확실히 가짜이다. ‘미인도’를 진품으로 감정한 측에서 화가가 그려놓고 잊어버렸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천경자의 수필을 보면 형태와 색채에 대한 묘사가 많이 등장하고 이렇게 형태와 색체에 민감한 작가가 몇 달 동안 구상하고 직접 붓을 들어 완성한 작품을 잊어버린다는 것 말이 안 된다. 오죽 답답했으면 ‘자식을 못 알아보는 에미가 어디 있느냐?’는 말을 남기고 이 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가서 절필하였겠는가? 

국립현대미술에서 미인도를 전시하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절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한국의 감정수준을 전 세계에 알리는 망신스러운 일이다. 흥행을 위하여 꼭 전시해야겠다면 미인도에 ‘작가는 이 작품을 그린 적이 없다고 주장함’이라는 설명을 붙이든지 천경자 관이나 코너를 꾸며 진품과 가짜를 직접 비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두 번째 위작으로 의심하는 작품은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한 박수근의 ‘빨래터’이다. 박수근의 그림은 가뭄 든 논바닥처럼 거친 마티에르 위에 그림을 그려 자연스럽게 점묘파 같은 효과를 거두어 아련한 서정성을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박수근은 거친 질감에 어울리게 주로 서민들의 신산스런 삶을 표현했다. 위작으로 의심하는 작품은 허술한 데가 아주 많다. 

첫째, 윤곽선이 굵고 군데군데 퍼져 있다. 진품은 윤곽선이 가늘고 깨끗하다. 화면을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지게 하는 방법은 알아내었으나 윤곽선을 깨끗하게 긋는 비결은 못 알아낸 게 아닌가 짐작한다. 윤곽선이 지저분한 다른 작품도 위작으로 의심하고 있다. 박수근이 노안이 와서 윤곽선을 지저분하게 그러놓고 알아채지 못한 거라고 주장할 수 있으나 시력을 중시하는 화가로서 안경을 안 쓸 이유가 없다. 깨끗한 것은 깨끗한 데로 지저분한 것은 지저분한 데로 시각적 일관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화가들이 같은 그림을 다시 그리면서 처음엔 윤곽선을 깨끗하게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지저분하게 그린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된다.

둘째, 얼굴의 윤곽선이 가짜로 추정하는 작품은 같은 로봇회사에서 생산하는 로봇처럼 천편일률적이다. 진품은 진짜 ‘빨래터’에서 관찰하여 아낙네들의 얼굴선이 모두 달라서 사실적이다. 아낙네들의 얼굴선이 비슷하다는 것은 진품을 보고 베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박수근이 몇 년 후에 그리다 보니 기억이 희미해져서 아낙네들의 얼굴선이 비슷해졌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화가는 얼굴의 특징을 기억하기 때문에 얼굴선이 과장되면 되었지 비슷하게 될 리가 없다.

셋째, 빨래 통에 담긴 흰 빨래의 윤곽선이 진품은 다 달라서 사실성이 있는데 가짜로 추정하는 그림은 주로 뾰족한 윤곽선에 좌우가 거의 대칭이어서 소금을 수북이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림을 베껴도 참 성의 없이 베꼈다는 생각이 든다.

넷째, 시냇물 속의 바위 때문에 생기는 여울의 표현이 진품은 복잡하여 사실적인데 반에 가짜로 추정하는 작품은 거의 평행선으로 묘사되어 사실적이지 않다. 

다섯째, 맨 위의 아주머니가 허리끈이 살짝 튀어나와 있는데 이것이 가짜라는 증거이다. 보통 빨래터 갈 때 치마끈을 여미게 되고 빨래터에 도착해서 쪼그려 앉게 되면 배가 나와서 치마끈이 더 등에 달라붙게 된다. 빨래터를 직접 본 사람과 상상으로 그린 사람의 차이가 이런 디테일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허리끈의 아래는 등에 붙으나 윗부분은 튀어나올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으나 한복 치마를 입고 쪼그려 앉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섯째, 가운데 앉은 할머니가 진품은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데 가짜로 추정하는 작품은 옆 사람을 보고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이 이 작품의 격조를 나타내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할머니는 젊은 시절을 회상하든지 혼잣말로 내 젊을 때에는 이랬니라 하고 말하는 것 같고, 옆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할머니는 연예계 뒷담화를 하는 것 같다. 고개의 각도와 시선은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로뎅의 ‘지옥문’ 중에서 ‘생각하는 사람’의 눈동자가 조금만 옆으로 벗어나도 한눈파는 남자가 되고, 뭉크의 ‘절규’에서 여자의 고개가 조금만 옆으로 가 있었으면 내적인 절규가 아니고 무언가 공포스러운 걸 발견하고 지르는 평범한 절규가 되었을 것이다. 

양산대 이세훈 교수가 만든 겟세마네동산의 예수와 열두제자를 표현한 작품을 보면 예수는 차 데울 때 쓰는 납작한 촛불로 나타내고, 열두제자는 테라코타두상을 촛불 주위에 동그랗게 배치하였다. 예수를 상징하는 납작한 촛불은 낮은 데로 임하는 예수의 겸손함과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지만 제자들에게 빛이 되고 싶은 예수의 순정한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예수의 제자를 표현한 열두 개의 테라코타두상은 각기 고개를 틀어 다른 방향을 봄으로서 각각의 목적과 고뇌를 나타낸다. 베드로는 아마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로부터 들은 예언 ‘이 밤이 새기 전에 나를 세 번 모른다고 부정하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할 것이고 유다는 열심당(우리로 치면 일제강점기시대 독립군이나 의열단에 해당한다) 당원이었기에 예수의 능력을 어떻게 하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는데 이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로마에 세금을 내야하느냐는 곤란한 질문에 예수는 동전을 보더니 로마의 것은 로마에게 돌려주라고 답했는데 처음에는 곤란한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예수의 재치로만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욕심을 자극하는 화폐경제를 폐지하고 종교적 원시공동체를 꾸리자는 제안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열두 개의 테라코타두상 중 촛불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고 사랑받지 못했음을 표현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예수가 처형된 후 시체를 거두러 온 사람이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뿐이었겠는가?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것은 따스함과 강한 외로움과 쓸쓸함이었다. 이 작품을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아낌없이 주었으나 끝까지 이해받지 못한 예수의 고독이 되겠다. 십이는 십이진법 가운데 가장 큰 수로 열두 가지의 고개 각도는 세상의 모든 시선과 지향적 개성과 고뇌를 의미한다. 예수가 열두 명의 제자를 들인 것도 세상의 모든 인간형을 제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출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에 영어처럼 십이진법이 숫자체계에 포함되어 있다고 짐작한다. 영국과 미국인이 암산에 유독 약한 것도 십이진법과 십진법이 섞인 숫자 체계 때문이다. 이렇게 고개 각도가 중요하다는 걸 생각하면 허공을 쳐다보는 할머니와 옆 사람을 쳐다보는 할머니의 격조는 천지차이가 난다. 진품은 사십 오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데 가짜로 추정하는 작품은 사만 오천 원을 받아도 안 가져갈 격이 낮은 작품이다.

그 외 소매 표현이 미숙하다든지 인체해부학적으로 미묘하게 어긋난 표현을 많이 지적할 수 있다. 오십년대 미군 부대에 근무하면서 박수근으로부터 직접 그림을 샀다든지 박수근의 아들이 아버지의 그림은 만져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진품이라고 하는 주장은 많지만 모두 말 뿐이고 당시에 쓰던 프레임과 캔버스 천 등 일부 물증은 있으나 그런 고가의 가짜를 만들려면 그럴 듯한 소장 이력을 꾸며내고 당시에 쓰던 프레임과 캔버스 천과 물감을 사용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문제는 예술성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미술품은 예술성에 비례하여 가격이 매겨져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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