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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프 Oct 25. 2020

별 거 아닌 소비 생활 / 심적 가난 -1

민트색 코듀로이 숏패딩을 샀다. 코듀로이 숏패딩은 작년에도 사고 싶었고, 민트색은 언제나 입어보고 싶은 색이었지만 결국 무난한 것만 택해느라 제대로 입어본 적 없는 색이었다. 숏패딩답게 애매한 핏을 가졌고 그만큼 귀여워보였다. 그래서 섹시한(?) 옷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물론 '섹시한' 옷은 딱히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내 딴엔 저렴하지는 않은 축에 속하는 금액을 주고 갈색 로퍼도 주문했고(하지만 와인 마시는 값 생각하면 또 별 거 아닌 거 같지...), 그간 하지 않던 의류 쇼핑에 탄력받은 김에 벨벳 밴딩 팬츠도 두 벌 샀다. 내년에 이사갈 때나 사려고 했던 이불 패드와 신발 수납장도 샀다.


작년 여름, 왕복 3시간 이상 걸리는 통근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쫓기듯 구한 전세 1억짜리 역세권 집은 너무나 자그마했고, 그러므로 함부로 가구를 들여놓을 수도 짐을 늘릴 수도 없었다.


하긴 애초에 뭘 들일 만큼 여윳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버는 족족(까진 아니지만) 내 벌이 치고는 비싼 음식과 술에 갖다 바쳤으니. 물론 후회하지는 않는다. 지난 1년 반 동안 내가 쌓은 경험과 지식과 미식 어쩌고에 충분히 만족하니까.


어쨌거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깔끔하고 커다란 신발 수납장 대신 저렴하고 투박한 조립식 플라스틱 신발장을, 내 마음에 드는 색상과 디자인의 이불 대신 본가에서 묵혀두던 이불을 사용해오던 중이었다. 이불 컬러가 마음에 안 들고 패드가 좀 헐긴 했어도 당장 쓰는데 무리가 없으니 그럭저럭 써 왔는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참 추접스럽다 싶은 거다. 신발장, 이불 패드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는 내가.


그날은 차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사온 뒤로는 잘 마시지 않은, 그리고 엄마가 다려준 옷이야 잘 입지만 직접 단정히 다려입을 생각은 안 해온 내가 오랜만에 물을 끓여 향이 좋은 차를 내려 마시면서 스팀다리미로 가을옷을 다림질한 날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나의 삶의 태도를 바꿀 아주 작은 터닝 포인트가 문득 등장한 거라고. 아주 운명같이. 물론 이 운명 또한 내가 만든 거지만.


그 길로 네이버에 신발 수납장을 검색했다. 지금 쓰고 있는 수납장과 별반 차이나지 않는 크기의, 하지만 한결 나아보이는 디자인의 수납장이 나왔다. 가격도 쌌다. 줄자를 들고 이리저리 크기를 재보고 내가 가진 신발 수를 세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결제 버튼을 눌렀다. 이어서 이불 패드를 검색했다. 색도, 품질도 적당히 괜찮아보이는데 몇 만원도 안 했다. 베갯잇까지 색을 맞춰 주문하고나니 맥이 탁 풀렸다. 이렇게 간단한 걸. 이렇게나 간단한 걸. 대체 그동안 나는 왜. 


솔직히 말해 주문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주문한 직후까지는 당장 급한 것도 아닌 거에 돈 쓸 필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주문하고 하루, 이틀이 지나니 그렇게 비싼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망설였나 싶어졌다. 그렇다고 평소에 다른 데에 돈 쓰는 취미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먹고 마시는 데에 돈을 좀 많이 쓰긴 했지만 슬슬 줄여도 되겠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당장 내 집에서, 내 눈에 내내 보일 두 가지를 바꿨다 생각하니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간 나를 억누르던 심적 가난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사기 얼마 전에는 실내 싸이클을 샀다. 일반적인 제품과는 달리 손잡이도 등받이도 없는, 하지만 그만큼 작고 깔끔한. 작고 귀엽고 소중한 집 사이즈 때문에 실내 싸이클은 엄두도 못내왔지만, 날이 추워지고 코세글자 시국 때문에 헬스장에 가기도 어려우니 어쩔 수 없었다. 마침 나는 본가에 살 때 실내 싸이클로 운동 효과를 톡톡히 봐온 전적이 있기에 크기와 수납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더는 망설이지 않고 구매버튼을 눌렀다.


이 모든 쇼핑이 최근 2주 동안 이뤄졌고 그래서 내 통장이 탈탈 털렸냐 하면, 평소보다 먹고 마시는 데 쓰는 돈이 확 줄어든 덕분에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다음달에는 하트 버튼이 달린 블랙 벨벳 원피스를 살 거다.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검정색 워커도 살 거다. 그래서 민트색 코듀로이 숏패딩이랑 같이 입고 신을 거다. 평소에 시도해보지 않던 스타일이지만 이번엔 해볼 거다. 어떤 스타일에 도전하지 않는 것도 심적 가난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 쓰는 아이깨끗해 핸드워시를 다 쓰면 포근한 향이 나는, 좋은 핸드워시도 새로 살 거다. 보기만 해도, 아니 생각만 해도 조금은 기쁠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가끔은 맛있는 걸 먹고 마실 거다. 한쪽의 가난을 해결하느라 다른 한쪽을 다시 가난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행복을 찾아봐야지. 내가 누릴 수 있는, 내가 만들어갈 수 있는 나의 행복.


그래서 결론은, 제 심적 가난이 -1 됐다는 겁니다. 축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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