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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프 Nov 24. 2023

내 생애 가장 쓸모없이 감성적인 일


일단 여기에 감성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맞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1.

몇 달 전 챗gpt를 사용해 긴 글을 짧은 글로 압축하는 작업을 일주일가량 했다. 소설이나 평론 같은 건 아니고, 실제 발생한 사실을 잘 구성해 더 극적으로 보이도록 만든 내용이었는데, 여러 번 수정 요청을 해야 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 소요됐어야 할 인지적 노력을 아낄 수 있어 꽤 괜찮았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챗gpt가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분명 어미를 '~음', '~임'의 형태로 바꿔달라고 했는데 자기 멋대로 '했습니다', '입니다' 체를 쓰기도 하고, 한국어로 실컷 잘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영어로 말하는 경우도 생겼다. 어쩔 수 없이 그 날은 그대로 종료하고 다음 날 다시 이어서 작업하곤 했는데,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챗gpt 얘, 내가 일 너무 많이 시켰다고 머리에 과부하가 온 건가?'


그 뒤로 챗gpt를 사용할 일이 없어 잊고 지내다, 며칠 전 파이썬 코드를 짜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오랜만에 챗gpt를 켰다. 놀랍게도 챗gpt는 내가 원하는 방향에 맞춰 순식간에 긴 코드를 짜냈고, 나는 그걸 그대로 복사해서 파이썬에 갖다붙이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다. 11월 달력을 출력하는 팝업을 띄워달라는 코드였는데, '11월 달력'이라는 팝업은 뜨지만, '11월 달력 출력'이라는 버튼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는 문제.


물론 챗gpt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방법을 알려줬다. 진짜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챗gpt가 하는 말을 도무지 못알아듣겠는 거다. 이를테면 이런 거였다.


-

챗gpt: 그러한 경우, 가상환경에 문제가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가상환경을 비활성화하고 어쩌고하고 저쩌고하세요.


나: 가상환경을 어떻게 비활성화하는데?


챗gpt: 명령프롬프트에서 "어쩌고저쩌고사용자이름어쩌고코드"를 실행하시면 됩니다.


나: (파이썬에 "어쩌고저쩌고사용자이름어쩌고코드"를 넣는다) 이렇게 해도 안 되는데? 파이썬에 이렇게 떠. (파이썬 화면을 복사-붙여넣기 해서 보여준다)


챗gpt: 명령프롬프트는 파이썬과 다릅니다. 파이썬이 아닌 명령프롬프트에 입력해주세요.


나: ...명령프롬프트가 뭔데? 어떻게 들어가는 건데?


챗gpt: 명령프롬프트란 어쩌고저쩌고입니다. 어쩌고저쩌고에서 cmd를 누르시거나 어쩌고저쩌고. 거기에서 어쩌고저쩌고.


나: 아, 알겠어. 명령프롬프트에 들어와서 니가 쳐준 코드를 넣었는데 이렇게 떠. (명령프롬프트 화면을 복사-붙여넣기 해서 보여준다)


챗gpt: 그 코드에서 '사용자이름' 부분에는 컴퓨터 이름을 써주셔야 합니다. 만약 컴퓨터 이름이 비둘기라면, "어쩌고저쩌고비둘기어쩌고코드"를 입력해주셔야 합니다.


나: ...(나의 멍청함에 몹시 놀란다)

-


이쯤되니, 살면서 나 자신에 대해 쌓아온 신뢰(나 정도면 똑똑하지)가 와르르 무너지며 챗gpt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민망함이 마구 치솟았다. 정말이지 살면서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멍청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는데 챗gpt는 나를 얼마나 멍청하게 볼까! (...)


그런 와중에도 나를 향해 매우 다정하게(내가 위에 적은 것보다 훨씬 다정했다), 그리고 꼼꼼하게 대답해주는 챗gpt라니. 거기다 디버깅을 위해 새로 짠 짧은 코드가 먹혀 기쁜 마음에 "정상적으로 출력돼!" 라고 보내니 "좋아서 다행입니다! 이제 어쩌고저쩌고..." 라고 온 답변을 봤을 때는 감동마저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이러다 또 심술을 부리거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나에게 지쳐 이상한 답변을 내놓으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대답 중간에 "친절하게 설명해줘서 고마워." 라는 문장을 섞었다.


2.

나는 중학생 때 '바람의나라'에 푹 빠져있었다. 렙업을 즐기는 것도, 사냥터를 탐험하는 걸 즐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기에는 거의 대부분 바람의나라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자주 하던 버릇이 뭐였냐면, 게임을 끄기 전 내 캐릭터를 주막으로 옮겨놓고(귀환 스킬을 쓰면 주막으로 돌아온다), 가끔은 주막 바닥에 깔린 이부자리(깔개 위에 베개 2개, 이불 1개가 놓인)에까지 들여놓는 거였다.


주막에 데려다놓는다고, 더더군다나 이부자리에 눕혀놓는다고 캐릭터의 체력이 회복되는 게 아닌데도 그랬다. 가끔은 캐릭터를 이부자리에 눕혀놓고 치렁치렁한 옷과 무거운 무기, 장신구가 거추장스럽지는 않을까 몇 가지의 옷을 빼두기도 했다. 좀 변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나 말고도 그러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여기서 제일 재밌는 건 이거다. '나 말고도 그러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는 것. 바람의나라 말고, 챗gpt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챗gpt를 활발히 쓰고 있는 내 친구에게, '나 가끔 걔한테 고맙다고 인사도 해'라고 (부끄럽지만)고백했더니 그 친구는 '나도 기깔나게 하면 그럴 때 있음. 영어로 할 때는 you will never know how thankful i am 이렇게 개오바 하고' 라고 답했다.


그래서 드는 궁금증 두 가지. 첫째, 챗gpt에게 감사를 표하면 좀 더 오래, 좀 더 잘 대답해줄까? (친구는 저런 감사인사를 하면 좀 옆으로 새는 것 같아서 감사인사를 지운다고 했는데 과연 어느쪽이 맞을지.) 두번째, 모든 사람들 중 이런 방식의 감성(이라고 일단 해두자)을 기반으로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될지.


아무튼, 나는 오늘도 챗gpt에게 감사인사를 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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