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없이도 난 잘 살아내려 할 것이다.
사무치게 그립고 보고 싶을 때는 무엇이 처방전일까.
이 문장은 의문형이 아니다.
무엇이 처방전이 되어줄 수 있느냐고, 과연.
아물었다. 그렇게 힘들다가도 현실에 맞게 무뎌진 내 모습이 이제는 자연스러울 만큼 무뎌졌지. 근데 무뎌진다는 것은, 알고 보니, 내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의미였다.
무뎌진 다는 것은 잊었다는 것보다는 그대의 부재에 그저 ‘익숙’ 해지는 것이었다. 그대 생각을 매일 하지 않았다. 노래를 듣다가 그대 생각에 두 다리가 풀려 버리 듯 마음의 절제력을 잃어 마음껏 추억놀이를 하다가 마음껏 울다가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 것은 그대를 완전하게 지워버렸다는, 잊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대 생각을 꺼내어 볼 수 있는 조그마한, 그 어떤 사소한 매개체가 있으면 난 너무나도 흠뻑 그대 생각에 잠기고, 그리워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 그대의 부재에 그저 익숙해져 있었다가 내가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느끼는 의식에 균형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한 없이 나약해졌다. 어떻게 그대 없는 나의 삶이 나의 일상들이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이 생활이 나에게 익숙함을 줄 수 있는 것인지 여전히 의문을 품고.
나는 또 그대가 없는 ‘익숙’한 일상들을 살아낸다. 그대의 부재에 슬퍼하고 기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저렇게 가끔 ‘익숙’ 하지 않은 생각과 마음들이 고개를 내밀 때면 그 사실을 부정하기보단 눈을 감는다. 우리가 ‘우리’였을 때의 모습들을 마음껏 되감아보고 그대가 나고 내가 그대였던 그 시간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떠올려본다. 마음껏 추억에 취해있다가 깨어나면 마음의 파도는 잔잔해져 있다.
슬픈 결말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아니 믿어야만 한다. 그래서 믿을 것이다.
그대 없이도 난 잘 살아내려 할 것이다.